2018.04.14 15:37

(67강) 반석을 치라

조회 수 82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출 17:1-7http://onlycross.net/videos/exo/exo-1701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설교>

기독교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보면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과 현실에 큰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기독교인이 믿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삶을 도우시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주기 위한 것으로 말하지만 이 또한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믿음과는 무관하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삶의 환경을 더 낫게 바꾸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이스라엘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칩니다. 르비딤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르비딤에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물을 달라고 하면서 모세와 다투게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르비딤이 물이 없는 곳이었다면 물을 준비해주셔서 이스라엘이 머무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시는 것이 여러분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원망하고 다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데려가시는 낯선 하나님을 경험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왜 이런 방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스라엘이었다면 그런 상황과 현실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누구도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대개의 기독교인은 이런 이야기에 귀를 닫아 버립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어떤 현실을 말한다 해도 ‘나는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에 붙들려 망하는 길로 가면서도 자신에게 닥칠 사태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 함께 하시거나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단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갈 수 없는 땅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에게 기적이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닫게 됨으로 감사하는 이스라엘을 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머무는 기간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순전히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고 인자하심이지 이스라엘이 잘해서가 아님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물이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그대로 있었다면 물이 없어 목말라 죽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자신의 현재를 이롭게 해주는 믿음을 생각하고 자신이 사는 것에 모든 의미를 두고 있기에 현재에 대한 기대가 뒤틀리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뒤틀려서 원망과 불평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뒤틀려질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인간이 기대하고 원하는 하나님은 현실에서 만나고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믿음의 실용성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것 하나하나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천국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말합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로 하여금 반석을 치게 하심으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도대체 이러한 과정이 왜 필요할까요? 어차피 물을 주셔서 마시게 할 것인데 처음부터 물이 있게 하시면 안되는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의문이 되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좇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물이 없는 르비딤으로 인도하셔서 원망하게 하시는 이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셨는데, 만약 반석이 살아있는 누군가라면 반석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원망 때문에 매를 맞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석이 매를 맞음으로 반석에서 이스라엘을 살게 하는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쯤하면 이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짐작될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반석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반석을 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매를 맞는 결과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으로 인해 하나님이 매를 맞으시고, 하나님이 매를 맞으심으로 이스라엘을 살리는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이 매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원히 생수가 되시는 구원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고전 10;4절을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인간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이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욕망과 습성이 동일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을 보면서 ‘나는 믿음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착각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세상과 똑같은 습성으로 살아왔음을 이스라엘을 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신앙 좋은 나’‘복음을 아는 나’, 이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하는 입장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만 남게 하는 것이 광야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원망이 있을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시는 것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전혀 이유와 조건이 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만 남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반석을 치라 하시는 것도 이스라엘이 맞아야 할 매를 하나님이 대신 맞으시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로 연결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매 맞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나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이 매 맞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서 자신에게는 공로가 되거나 자랑이 될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그가 바로 매 맞고 죽으신 예수로 인해 산 자인 것이고, 자신의 이름과 가치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고 자랑하는 일에 마음을 두게 되는 신자입니다.

 

 

7절을 보면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자신들에게 계시는가 안 계신가의 문제를 환경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환경의 문제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문제 안에서만 경험될 뿐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세계에 굳건히 세우시는 것으로 하나님은 살아 일하시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성경본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신윤식 2022.01.01 949
공지 암, 옵, 욘 성경강해 방으로 옮겼습니다. 신윤식 2011.02.28 7273
공지 이전 홈페이지 수요일설교 들어가기 은석교회 2010.01.01 40096
159 아 1:3 (2강) 사랑하는 이유 신윤식 2021.03.13 639
158 아 1:1-4 (1강) 솔로몬의 아가 신윤식 2021.03.06 901
157 출 40:17-21 (153강) 성막을 세우니라 신윤식 2020.12.31 625
156 출 40:9-13 (152강) 거룩하게 하라 신윤식 2020.10.24 1587
155 출 39:42-43 (151강) 명령하신 대로 1 신윤식 2020.10.17 1158
154 출 36:8-13 (150강) 성막을 만들다 신윤식 2020.10.10 28224
153 출 35:30-36:1 (149강) 지혜로운 자 신윤식 2020.10.03 795
152 출 35:20-29 (148강) 자원하여 드린 예물 신윤식 2020.09.26 708
151 출 35:1-3 (147강) 거룩한 날 신윤식 2020.09.19 1618
150 출 34:29-35 (146강) 얼굴의 광채 신윤식 2020.09.05 795
149 출 34:27-28 (145강) 여호와와 함께 신윤식 2020.08.29 641
148 출 34:25-28 (144강) 새끼와 어미 신윤식 2020.08.08 972
147 출 34:21-24 (143강) 쉴지니 신윤식 2020.08.01 594
146 출 34:18-20 (142강) 무교절의 의미 신윤식 2020.07.25 12485
145 출 34:11-17 (141강) 질투의 하나님 신윤식 2020.07.18 704
144 출 34:10 (140강) 언약을 세우나니 신윤식 2020.07.11 514
143 출 34:1-9 (139강) 다시 만든 돌판 신윤식 2020.07.04 5162
142 출 33:17-23 (138강) 내가 하리니 신윤식 2020.06.27 15526
141 출 33:12-16 (137강) 무엇으로 알리이까 신윤식 2020.06.20 793
140 출 33:7-11 (136강) 회막 신윤식 2020.06.13 5434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5 Nex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