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8 15:20

(69강) 모세의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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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8:5-12http://onlycross.net/videos/exo/exo-1805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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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6.그가 모세에게 말을 전하되 네 장인 나 이드로가 네 아내와 그와 함께 한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네게 왔노라

7.모세가 나가서 그의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8.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9.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10.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11.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12.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설교>

18장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온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드로가 모세의 가족을 데리고 찾아온 것은 1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에 대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드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되었고, 모세의 가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 안에 있게 하고자한 뜻으로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지 모세의 가족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는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이 있습니다. 게르솜은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으로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쳤을 때 십보라와 결혼하고 낳은 아들입니다. 엘리에셀은 ‘나를 구원하셨다’는 뜻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애굽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일이 있는데 그 때 십보라가 할례를 행한 아들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모세가 가족과 헤어진 것은 그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8절의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라는 말처럼 이드로는 모세로부터 여호와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드로는 애굽의 열 재앙을 포함해서 홍해를 건넌 일과 광야에서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거짓말인가 아닌가’부터 따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은 세상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드로는 특이한 반응을 보입니다.

 

 

9-10절을 보면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라고 말합니다.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들은 이드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고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드로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이방 사람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반응은 뜻밖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의 이야기는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세상 상식과 경험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드로가 여호와를 찬송한 것을 두고 이드로가 하나님을 알고 섬겼던 사람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드로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든 알았든 상관없이 여호와를 찬송하게 된 것은 모세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능력으로 다가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드로가 모세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늘 현실의 문제에 의해 묻혀 버리고 은혜로 인한 찬송 대신 원망만 드러냈습니다.

 

 

이드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로만 들을 뿐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신앙하는 일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특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드로를 놓고‘누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더 유리한가?’라고 물으면 이스라엘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을 믿어온 족속들인 반면에 이드로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온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방인이 하나님이 행하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임을 눈치 채며 찬송하게 된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니고 열심이 있다는 이유로 ‘신앙이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는 경력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능력이 아니고 교회 생활의 열심이 은혜를 알게 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찬송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은혜임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에 무릎 꿇을 뿐입니다.

 

 

이드로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체험한 것은 없습니다. 만나를 먹은 것도 아니고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을 체험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세의 이야기만 듣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셨음을 아는 것이고 여호와가 모든 신보다 크시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이드로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잘됨이나 부요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신앙에 부족함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육신의 체험이 신앙생활에 유리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무시한 교만이며 인간적 계산일뿐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듣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지금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셨음을 믿는 믿음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드로가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이 그 증거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단순히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일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한 뜻으로 우리에게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일하는 영역이 있고 하나님이 일하는 영역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이뤄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구원 앞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한 자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 무능을 생존의 문제에서 드러나는 죄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절감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은혜로 다가오는 것도,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공로를 의지하며 나의 모든 공로도 무가치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증거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일하심만 있게 되는 것이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신앙의 세계를 한낱 인간의 행위로 해석하는 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소경이 되고 자신의 공로와 열심에만 눈을 뜨고 있는 유대교적 모습만 보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이 행하신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자신이 행한 일을 자랑하는 것으로 믿음을 돋보이고 싶어 하는 바리새인으로만 가득합니다.

 

 

이드로가 자신의 일로 인해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은 세상 일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일하시는 이야기만으로도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서 기뻐하고 찬송하는 그들이 곧 신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일에서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로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일로 인해 슬퍼하기도 하고,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일로 늘 흔들리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인간의 실존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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