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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0:1-6http://onlycross.net/videos/exo/exo-10010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설교>

우박 재앙 후에 하나님은 또 다시 모세에게 바로에게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게 들어가게 하신 것은 바로를 설득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내보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하시고 바로와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심으로 드러난 것은 말씀과 바로의 속성과의 충돌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증거 되는 것은 바로와 동일한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결국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충돌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속성이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현실화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호적이다’‘나는 예수님 편이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스스로를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인간의 실체는 말씀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완강한 마음의 소유자인 바로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자손을 내 보내라 그리하면 애굽을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부요한 나라로 만들어 주겠다’는 내용이라면 바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스라엘을 보내든 보내지 않든 어쨌든 모세의 말에 호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보내주었을 때 약속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일방적인 요구만 있습니다. 3절에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백성을 보내라는 명령만 존재할 뿐 보냈을 때 주어질 보상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을 보내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애굽을 위한 훌륭한 자산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가, 보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로의 반응이 낯설다고 생각됩니까? 낯선 반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내 수중에 있는 것을 나의 소유로 간주하고 붙들고 지킵니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이 소유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해도 말씀을 거부할지언정 소유는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곧 우리인 것입니다.

 

 

부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영생을 위해서는 소유를 버려야 하는데 부자는 소유를 택하고 대신 영생으로부터는 등을 돌립니다. 보이지 않는 영생의 문제보다는 보이는 소유에 더 마음이 끌린 것입니다.

 

 

이 내용 다음에 베드로의 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입니다.

 

 

베드로의 말에서 드러난 인간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역시 대가, 보상입니다. 부자는 소우를 버리지 못해 돌아갔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자신들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것을 자신의 행위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영생을 기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속성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것이 신앙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 것으로 증거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공로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이 오심으로 드러난 충돌입니다.

 

 

그런데 마 19:29절에 보면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하는 베드로는 이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으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버리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위의 가치 인정입니다. 주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자기 행위의 가치가 인정되고 영생으로 보상받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것을 자기로부터 자신에 의해 생산된 의의 행동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자가 아닙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아담의 속성 자체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오심으로 자신을 부인하게 된 하나님의 사람만이 영생에 참여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이기 때문에 세상은 복음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타협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타협, 보상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주겠다’는 거래가 없습니다. 때문에 말씀은 아담의 속성과 필히 부딪히고 충돌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는 충돌을 제거하기 위해서 보상과 대가가 있는 말씀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거래 또는 보상이 있는 말씀에는 자기 손해가 없습니다. 행한 것만큼 보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천국에 가서라도 다른 사람보다 큰 상을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현재 수고하고 힘쓴 일들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기대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상을 약속하는 말씀 아닌 말씀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탄의 유혹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아담의 후손답게 여전히 선악과를 먹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상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증명된 것은 인간은 누구도 믿음의 길을 자기 의지와 결단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절 뒤에 보면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라고 말씀하고 2절에서는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 내린 것을 표징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이 애굽의 표징을 통해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던 바로를 이기시고 애굽에서 구출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잊지 않아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공로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공로가 자리할 수 없기에 공로로 인한 보상이나 대가로 주어지는 것 또한 없는 것이 은혜의 세계입니다. 이 은혜를 잃지 않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이스라엘다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있을까요? 좋은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아담의 속성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인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진 것 자체가 좋은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좋은 일로 보게 되면서 기쁨과 감사가 있는 길로 가기를 소원하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재앙의 경고를 받아도 끄떡하지 않는 바로처럼 완강한 마음의 소유자들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신자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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