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6 16:29

(39강) 장정만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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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0:7-11http://onlycross.net/videos/exo/exo-10071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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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9.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설교>

거듭되는 재앙을 견디지 못한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것을 촉구하게 됩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7절)내용처럼 애굽이 망하게 되었으니 이제 그만 그들의 말을 들어 주자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데려오자 바로가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하고 여호와를 섬기러 갈 자가 누구누구인지를 묻습니다. 바로의 물음에 모세가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라고 답합니다.

 

 

남녀 노소를 데리고 가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고 양과 소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재산까지 가지고 나가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역시 바로의 입장에서는 쉽게 허락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바로는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바로가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10절)고 한 말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지금 바로는 모세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고 싶은 것이 바로의 마음이기에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서 나가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바로의 입장과 의도를 이해하고 10절의 말을 생각한다면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의 말에서 오늘날 우리를 설득시키는 사탄의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10절의 말을 하면서 장정만 가라고 하는 바로의 심중을 깊이 엿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먼저 바로는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내든 보내지 않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데 바로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의 신지식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에 대한 바로와 세상의 지식은 고정된 곳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특별한 장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특별한 형상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신과 함께 하는 것이고, 거룩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신과 함께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는 이스라엘을 어린아이까지 모두 보낸다면 이스라엘 전부가 애굽에서 나가는 것이 되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는 애굽에 있지 않고 이스라엘과 함께 나갈 것이고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다만 바로가 몰랐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을 포함하여 온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애굽이 하나님이란 신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자신들은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동일한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사고입니다. 하나님을 기독교인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는 것을 나쁜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누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나쁜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과 함께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와 내 가정과 내 사업과 내 교회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로의 말은 하나마나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무지 설득의 요소를 갖추지 못하는 엉터리 말로 들릴 것입니다. 만약 바로가 여러분께 ‘하나님이 너에게 함께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래 맞다’라고 바로의 말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의 말은 전혀 인정할 수 없는 엉터리 말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호와가 함께 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바로의 말에는 ‘지금까지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해서 잘된 것이 뭐가 있느냐?’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가 함께 했다 해도 잘 된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바로의 시각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조상 대대로 여호와를 섬겨 왔지만 그들의 현실은 바로를 주인으로 섬기면서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지내오게 된 것도 애굽의 도움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왔다면 애굽의 노예로 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런 시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이스라엘에게는 나쁜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도 이런 의도에서 하는 말입니다. 장정만 가라는 것은 애굽에 가족이 남아 있으니까 다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를 하되 애굽으로 돌아와서 바로 자신의 도움을 받으며 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보다 너희에게 유익이라는 것으로 모세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로의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사탄이 무엇으로 우리를 설득하는가?’입니다. 바로 현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도 잘된 것이 뭐가 있느냐?’도 사탄의 설득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잘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것 역시 사탄의 설득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도 사탄에게 설득당한 결과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유익이 된다는 말에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처럼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의 목적과 방향 또한 자신의 유익에 두고 있는 모든 것이 사탄에게 설득당한 자로 살아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욥의 재앙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의 재앙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분명 나쁜 것이고 ‘하나님을 믿어도 잘된 것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게 한다는 본질을 놓치게 되면 믿음에 담긴 참된 유익을 생각지 못할 것이고, 결국 세상과 동일하게 세상에서 믿음의 유익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에게 설득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바로가 이스라엘을 놓지 않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주인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한 순간도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 놓지 않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내가 의도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인생을 끌어가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을 품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것은 어쨌든 기독교인의 위치에는 있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세상으로 돌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정만 가서’라는 말로 모세를 설득하는 바로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늘 사탄에게 설득당하며 삽니다. 문제는 사탄의 설득이 우리의 사고와 본성에 지극히 부합된 내용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지혜이고 간교함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간교함에서 우리를 지키고 주께로 인도해 가는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사탄의 간교함을 분별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이 우리에게서 어떻게 역사 되는지가 증거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면서 설득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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