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2 16:15

(40강) 여덟째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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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0:12-20http://onlycross.net/videos/exo/exo-1012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 땅 위에 네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여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

13.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매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14.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15.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16.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17.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18.그가 바로에게서 나가서 여호와께 구하매

19.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20.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설교>

애굽에 재앙이 반복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바로의 완악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20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한 바와 같이 여덟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에서도 바로는 완악함을 드러냅니다.

 

 

재앙 때마다 등장하는 바로의 완악에 대해 주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재앙을 견디지 못한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16,17절을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메뚜기 재앙을 겪는 바로의 진심이었고 이스라엘을 보냈다면 재앙이 계속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재앙이 계속된 것입니다. 중점은 재앙의 초점이 애굽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애굽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한 재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굴복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속마음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계속 붙들어 놓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바로의 완악함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완악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지옥 갈 자로 생각합니다. 길거리에서도 간혹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그 말대로 불신자는 누구든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불신자가 있는 현실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존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불신자라 칭하면서 소위 전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그들을 세워서 우리 자신을 전도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재앙을 겪는 바로와 이스라엘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지금 바로는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가 모세로부터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반응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말로 하나님 없이 독립적으로 홀로 존재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완악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로의 완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남으로 드러났습니다. 도무지 들어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말씀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인간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불신자의 속성이고 완악함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은 어떨까요?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하신 실상이었고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는 명목만 붙들고 있으면서도 내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불신자의 완악함이라면 우리는 완악하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그런 자신감을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신앙한다 해도 삶에서 드러나는 속성은 하나같이 불신자의 속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불신자와 다른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와 똑같이 살아도 된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과연 신자로서 불신자와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당장은 다른 삶을 살지 못한다 해도 불신자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은 불편한 현실을 모면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로서의 고백도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 세계에 속한 자의 말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와 이스라엘의 이야기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재앙을 겪고 있는 애굽만 보이십니까? 여러분이 보셔야 할 것은 재앙으로 고통스러울 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죄지었다고 고백하는 바로에게서 늘 평안한 삶을 꿈꾸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바로가 비록 모세에게 자신이 여호와와 이스라엘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지만 그 고백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자신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의 이런 모습에서 현재의 기독교인을 만나고 제 자신을 만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지가 바로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마음에 편안한 현실을 꿈꾸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가 말하는 죄는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즉 바로는 자신의 행동만을 생각할 뿐 행동이 나오게 된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에 대한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수준일 뿐이고, 행동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도덕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굽은 우박 재앙으로 인해서 곡식이 모두 상했지만 밀과 쌀보리는 아직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않았습니다(출 9:32). 하지만 메뚜기로 인해서 애굽 온 땅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않게 됩니다. 바로는 이러한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기에 죄를 지었음을 자복하고 빨리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메뚜기가 사라지자 이스라엘이 있어야 재앙으로 비참하게 된 애굽의 현실을 복구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보내지 않겠다는 완악함을 드러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완악함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현실의 문제에 따라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마음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은 우리의 의지나 자신감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 이유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처럼 완악한 우리를 붙드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생각하고 모든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스라엘에게 하고 계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면서 바로의 완악함이 이스라엘에게 있음을 보게 하시고 그들에게 이루아진 모든 일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재앙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찾는다 해도 모두가 자신이 원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곧 여러분의 모습인 것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완악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말씀으로 붙드시고 가르치면서 예수님의 은혜로 인도해 가시는 사랑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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