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3 16:04

(54강) 바로의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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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4:1-9http://onlycross.net/videos/exo/exo-14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5.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동행을 구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신을 섬기는 모든 종교 세계에 있는 공통점입니다. 이유는 신이 함께하고 동행함으로써 자기의 일을 도우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을 찾는 인간의 기본적 속성이자 종교성입니다.

 

 

이들에게 신은 자기를 섬기는 백성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는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신은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은 이러한 종교적 생각을 뒤엎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인도되는 길이 편함이 아니라 괴로움을 뛰어넘어 위기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숙곳을 떠나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칩니다(출 13:20). 지리적 여건을 보면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이 광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굳이 홍해를 건널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홍해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하여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3절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고 말합니다. 바닷가에 장막을 친 것은 나아갈 길이 바다에 막힌 것이기 때문에 바로가 볼 때 광야에 갇힌 것과 진배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닷가에 장막을 침으로써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추격할 빌미가 된 것이고 이스라엘은 홍해가 가로막힌 상황에서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는 위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길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길로 가게 하신 결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하여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시고 애굽 군대는 몰살시켰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위기상황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셨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생각이 앞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도 같은 생각이었을까요? 애굽 군대가 추격하는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을 알고 믿었다면 모세를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가만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과 함께 여호와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 두려움과 염려 없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기다립니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불평을 토로하며 어려움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백성을 위기와 어려움의 상황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10절에 보면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말합니다.

 

 

이 부르짖음은 바로의 추격으로 인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도 말하지만 부르짖음이 자신의 힘으로는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호소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홀로 일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데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쉬운 길로 어려움 없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면 하나님이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과 불평으로 뭉친 자신들을 거룩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인 것을 보지 못한 채 약속의 땅이라는 환경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까? 누구나 하나님을 위대하시다고 말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인지에 대해서는 오해를 합니다. 가장 많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이나 세상 만물을 운행하시는 것을 두고 위대하심으로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알게 되는 위대하심은 도무지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불의한 존재인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놓치지 않으시고 붙들어 천국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높이고 찬송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고 십자가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진 현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는 삶으로 이해한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할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라고 말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신 재앙은 애굽 전역을 통곡 소리로 가득하게 하는 애굽을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바로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지만 바로는 또다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광야에 갇혔다고 생각되는 이스라엘을 추격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의 체험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붙들어 놓지를 못하지만 재앙을 체험했다 해도 역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생각이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으며 이러한 인간이 구원에 속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이루신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하여 이스라엘 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는가를 아는 것이 이스라엘 된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절망과 두려움의 상황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동행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평안할 것이라는 생각은 내려놔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게 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결코 육신의 편함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평안으로 인도하셨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까? 그것은 인생의 끝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육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존재’ 이것이 가장 정확한 말일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의 존재이고 그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자리에서 유일한 희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그리스도임을 안다면 삶의 평안보다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뜻과 소원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위대하다 찬송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는 자신을 벗어나는 이스라엘을 용납하지 못하고 추격합니다. 자신의 권세와 다스림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항상 세상으로부터 추격을 받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원리와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수고하고 일한 만큼 신이 보상해주는 방식의 믿음으로 타협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하나님이 홀로 일하신 것과 홀로 이루셨음을 자랑하고 증거 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에서 늘 확인하게 됩니다. 나는 죽음의 존재일 뿐이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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