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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5:22-27http://onlycross.net/videos/exo/exo-15222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설교>

하나님의 구원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된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이 구원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초점을 두면 제한적 구원은 불합리한 것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처음부터 제한을 두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 구원에 제한을 두시는 것일까요? 만약 구원에 제한이 없다면 구원의 근거는 인간에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지만 인간이 구원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에 탈락시킨다는 방식의 구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원의 공로가 구원된 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뻔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구원 방식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행함에 따른 선악을 판단하여 선한 자는 천국으로 악한 자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선한 자라는 판단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게 살자는 인간의 방식 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도 제한적 구원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해당된다는 제한적 구원을 주장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제한적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만 국한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제한은 민족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에는 인간의 조건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으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할례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한적 구원은 아닌 것입니다.

 

 

할례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에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할례를 행하라는 계명을 따라 전통적으로 할례를 행할 뿐이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도 결국 애굽적 사고봉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동일한 심판의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홍해에서 이스라엘만 구원하셨을까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을 보여주는 것인데 인간으로서는 동일하게 심판받을 존재일 뿐인데 하나님이 택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된 자들이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보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등장합니다. 홍해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모른다 생각하고 홍해 이후의 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구원의 노래를 불렀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편한 삶을 누리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기다린 것은 목마름이라는 고통이었습니다.

 

 

22,23절을 보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여전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계시고 이스라엘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보고 길을 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라에서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인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예상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쓴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을 이유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노래한 후라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의 사고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이 복주고 평탄한 삶이 되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은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말입니다. 다만 자기의 편함을 추구하는 애굽적 사고방식의 인간 취향을 맞추기 위한 거짓된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애굽적 사고방식이 애굽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구축되어 있으며 오늘 우리의 사고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 애굽의 사고로 존재하는 애굽인이라는 결론이고 따라서 인간은 홍해에서 멸망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 출애굽 이야기가 주는 내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치료를 받고 고침을 받아야 하는 병자입니다. 그리고 치료는 여호와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6절)는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은 이스라엘이 마라에 도착해서 구한 물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사흘 길을 걸었다면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구한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게 된 상황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성으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된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고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물이 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 또한 우리의 예상과는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가르치는 방식대로 하자면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고통이 상황에 주어지면 가장 최선의 방책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철야기도와 금식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 교회에서 배운 방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물이 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물을 달게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물을 달게 하신 후에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며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중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은 열 재앙에서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이 질병이 내리지 않기 위해서는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드러낸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한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을 민 14:22-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열 재앙에서 드러난 애굽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지 못함으로써 약속의 세계는 애굽적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치료하고자 하시는 것은 곧 애굽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적 사고로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치료 받고 고침 받아야 할 병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기독교인이 자신을 바라봐야 할 시각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치료를 받고 고침 받아야 할 병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품으로 고침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품은 도덕이나 인격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고침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아는 자기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고침 받아야 할 병자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그가 절실히 바라보는 것은 치료하는 여호와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자를 깨끗한 자로 씻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무한한 복의 세계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평강을 배우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환경의 평안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노래하면서 말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병자로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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