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0 17:01

(58강) 구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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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5:1-10http://onlycross.net/videos/exo/exo-15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5.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6.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7.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8.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9.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0.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설교>

애굽 군대가 몰살당한 가운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애굽 군대가 바다에서 몰살당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또한 바다에서 나올 수 없는 죽음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넌 것은 바다, 즉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출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올라온 민족으로 부각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찬송은 단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살았다’는 것보다는 바다라는 죽음의 힘으로부터 구출된 자들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구원의 노래는 구원받은 것으로 감사하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구원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구원의 노래는 바다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자를 끌어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감사하고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고 말합니다.

 

 

애굽 군대를 바다에 던지셨다는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도 바다에 던져져야 할 민족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들이 바다에 던져지지 않고 빠져나오게 된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에 대한 당연한 조치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노래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에 던져져야 할 자신들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빠진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가 자기를 위한 구원을 즐기는 것이고 그것이 곧 자기 구원에 목적을 둔 악한 권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함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데 우리의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나에게 목적을 두고 예수님을 찾는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홍해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입니다. 인간성이 달라진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서 건짐 받은 경험이 있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계속 죄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죄의 모습을 보면서 구원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2-3절의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는 내용도 바다에서 나올 수 없는 자를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초점을 두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의 힘을 이기고 나올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 것을 생각하면 바다에서의 구원은 여호와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을 홍해로 인도하신 것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홍해가 아니라 지중해 해안을 따라 블레셋이 위치한 쪽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그리고 블레셋을 하나님이 물리치신다면 그것으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힘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구원을 노래하고 여호와의 힘, 도우심을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육신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 빠진 자의 자기만족과 기쁨에 의한 노래일 뿐이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높이는 찬송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찬송이라고 부르면 찬송인 줄로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들끼리의 종교놀이일 뿐입니다. 종교놀이에 기도를 집어넣고, 찬송을 집어넣고 헌금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홍해로 데려가신 것은 죽음에서 건짐 받은 구원의 경험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자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본다면 오로지 하나님만 높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심각성을 가지고 들으셔야 합니다. 보편적으로 기독교인은 이러한 내용에 무관심합니다. 복잡하다고 생각되기도 할 것이고 그렇게까지 알지 못해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대개의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신앙에 인간적 요소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신앙이지 온전히 하나님만을 높이는 신앙이 아니기에 신앙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서도 심각성을 가지고 들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6절을 보면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 홍해를 향해 가면서 이러한 구원을 경험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구원의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상하고 기대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고생하던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으니 이제 좋은 일만 있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앞두고 죽음을 예상했지만,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을 빠져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노래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상하지 못한 구원을 경험한 자들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홍해에서 이스라엘은 살리시고 애굽은 죽이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살릴 자와 죽일 자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택일 뿐 인간의 자질과는 무관합니다. 인간의 자질을 따진다면 이스라엘도 애굽과 함께 바다에서 몰살당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바다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인간의 열심과 조건은 언급될 이유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오직 이 방향을 지향합니다. 인간의 행함과 실천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만을 행해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일한 것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만 보이기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의한 구원의 노래는 하나님이 홀로 모든 일을 다 이루셨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부족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이 이뤄주셔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 이루신 하나님보다는 이뤄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편한 조건을 따진다면 홍해가 없는 길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는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홍해라는 상황이 없는 길로 인도되는 것이 복일까요? 이러한 복을 기대한다면 그는 신자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이름을 가진 나로 존재하는 것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잘못된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악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이 바다에서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상한 것은 애굽과 함께 죽어야 하는 이스라엘이 구출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부름받고 신자 된 것도 이상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예상과 생각을 빗나간 신비의 사건입니다. 의로운 일을 행한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되어진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만 허용된 것처럼 십자가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에게만 허용된 은총입니다. 이 은총 안에서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이루어졌음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서만 가능한 구원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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