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7 16:02

(59강) 주의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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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5:11-18http://onlycross.net/videos/exo/exo-15111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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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7.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설교>

기독교인은 이스라엘의 기적 체험을 많이 부러워합니다. 홍해에서의 구원도 부러움의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깊은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나며 양쪽에 바닷물이 벽이 된 가운데를 건너고 애굽 군대는 몰살된 체험은 참으로 대단한 기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 해도 그런 체험을 하고 싶은 열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홍해에서의 구원은 이스라엘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체험이었습니다. 따라서 홍해를 건넌 후에 부르는 구원의 노래도 이스라엘이 예상하지 못한 체험으로 인한 노래였던 것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것이 애굽보다 나은 환경에서의 정착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구원의 노래는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서 누리는 하나님의 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홍해로 향한 길이 표면적으로는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로 보이겠지만 그 길에는 이스라엘이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에 신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자신이 원하는 자기의 길로 가고자 하는 포부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노래합니다.

 

 

여러분이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어떤 내용의 찬송을 하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에서 건짐 받았음을 감사하는 찬송을 할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다 죽었다는 우리만 살았다는 것이 감격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이스라엘의 구원의 노래를 보면 특이하게 ‘감사’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노래를 부를 법 한데 전혀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구원으로 인한 감사가 없어서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께 노래 자체를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홍해에서 건짐 받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시각과 다른 점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의 초점은 항상 ‘내가 구원 받았다’‘내가 천국 간다’는 것으로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감사의 노래도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홍해를 건넌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위엄과 기이한 일을 봅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는 뜻이고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합니다.

 

 

신자가 여호와를 노래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을 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삶의 조건과 형편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십자가 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완성으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는 완성된 구원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십자가 밖은 나의 세계를 뜻합니다. 내가 중심이 된 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형편과 조건이 기준이 된 감사와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위해 신을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서 드러나는 종교성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신앙과 중교는 반드시 구분된다는 것을 놓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애굽은 모두 죽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들은 구원 받았다는 것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는 노래라면 ‘위엄’이나 ‘기이한 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심판 할 자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으로 부정한 것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보이시면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홍해 사건에서도 부정한 존재인 애굽을 죽이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함께 거룩하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홍해 사건에서도 계속되는 것은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스라엘도 그 속성은 애굽과 같은 부정한 존재이지만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이하심은 바로 선택이라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주가 당연한 존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는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저주의 존재에게는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됩니다.

 

 

홍해에서의 애굽 군대의 죽음은 이스라엘 또한 죽음의 존재임을 보게 합니다.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봄으로써 죽음에서의 구원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이한 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의 처소’라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주의 처소가 아니라 나의 처소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의 몸이 거하는 처소를 좀 더 좋은 것으로 마련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구원도 자신이 죽은 후에 천국, 즉 좋은 처소에 들어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홍해 사건에서 심판이 당연한 자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끌어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본 것이고, 인자하심으로 구속한 백성을 인도하시는 것은 주의 힘으로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함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처소를 위해서 인도되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또 다시 주지해야할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신앙이 아닌 나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로 변질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있게 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할 백성을 하나님이 만들어 내심을 보여주는 것이 홍해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구원될 이유가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유를 가지고 주의 처소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주의 처소란 말씀드린 것처럼 부족함이 없는 완성의 세계이며 주께서 함께 하시는 세계라는 것만으로 충만의 상태에 있다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주의 처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 주의 백성은 자신의 행위나 수준에 대해 부족함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신자의 위상입니다. 때문에 본질을 따지면 저주에 속한 존재일 뿐인데 그러한 자신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생명의 세계에 있게 된 것으로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14-16절을 보면 에돔과 모압 등 앞으로 이스라엘이 만날 이방인들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장래를 이미 아는 것처럼 놀람과 두려움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주의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주의 처소 밖의 세상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내다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날에 세상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의 날로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은혜를 찬송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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