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2:1-3  주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이 마련해준 자리에 있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마련하려고 한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련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의 삶은 한마디로 투쟁입니다. 무엇을 위한 투쟁입니까? 세상에다가 자신의 자리를 남보다 더 든든히 마련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이 땅의 어느 인간이고 할 것없이 낮아진 자리는 원치 않습니다. 만약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밀려났다면 그것은 자발적으로 원해서가 아니라 외부적인 힘의 영향에 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실망과 낙심과 분노를 가슴에 둔 채 다시 예전의 자신의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자리를 차고앉은 사람에 대해서는 미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지금 현재의 자리가 하나님이 마련해준 자리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습니다. 오직 그 머리 속에는 높은 자리를 향한 일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자식을 통해서라도 높은 자리의 힘과 영광을 누려보고자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보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자신을 낳아준 부모보다 왜 자신이 낳은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내리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고통을 겪고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고통을 겪고 낳았으니까 사랑한다고 할 것 같으면 남자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여자보다 약해야 합니다. 남자들은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구경만 했지 여자의 고통을 함께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여자보다 남자가 더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마음은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됩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를 통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이 땅에다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 확보한 자리가 자식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거나, 또는 자신이 확보하지 못한 자리를 자식을 통해서 확보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부모는 자신의 자리를 이어가거나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루어 줄 대상도 아니지만, 자식은 자신의 대를 이어가고 또 잘만 키우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룰 수 있는 발판이기 때문에 자연히 애착은 부모보다는 자식에게 더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은 남보다 뛰어난 능력입니다.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자리를 잃어야 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에 능력을 기르고 능력을 소유하기 위한 애착심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다는 것은 곧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요즘 불경기에 퇴직바람이 불면서 아버지라는 자리가 위태롭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가정을 물질적으로 책임질 능력이 뒤쳐지는 사람들이 아버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의 자리 확보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없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늘과 땅사이에 자기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셔도 자기들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자신들은 세상에서 남보다도 든든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능력과 위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착각이었다면 이러한 착각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무엇을 해도 의가 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면 꼭 반문하는 것이 ‘그럼 인간은 무엇입니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까?’라는 것이 현대 신자들의 생각입니다. 결국 하나님도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중요성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인간이 없이 어떻게 전도하며 구제하며 복음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정을 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일하셔야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도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일을 하는 보람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혹시 그 생각을 하면서 마음 뿌듯해 하고 우쭐해 하면서 ‘나는 하나님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자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만큼은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따져보신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오셨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주의 일을 할 수 가 있습니까? 죄인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무가치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가치한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통해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누군가의 간섭을 받고 누군가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자신의 본성에 그대로 끌려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2절의 모습입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 한 말씀대로 자기라는 우상이 끄는 그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현대 교인들의 부족한 점은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에는 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라는 것은 나를 간섭하고 다스리는 분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자기하고 싶은 대로합니다. 무엇을 할 때 이 일이 주님의 뜻에 맞는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익이 되고 편한가를 먼저 살핍니다. 우리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앞서도록 하셔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은혜를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여러 종교 중에서 내 구미에 맞는 기독교라는 종교 하나를 선택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계획 중의 하나로 뽑혀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방인으로 있을 때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주의 자리를 십자가를 지신 그분께 내어드립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자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언제나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내 자리를 지키고 확보하기에 급급한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과연 은혜의 나라에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세상은 모여서 자기 자리를 자랑하기에 바쁘지만 은혜의 나라에서는 주님의 은혜만 자랑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한 삶입니다.

여러분, 이 땅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는 땅임을 아십니까? 은혜의 땅은 누구만 용납합니까? 은혜를 아는 자를 용납합니다. 은혜를 거부한 자는 땅도 그 자를 거부하는 법칙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1절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는 말씀과 같이 신령하다는 것은 주님을 주라고 부르는 은혜를 아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십니까? 그렇다면 마음대로 살지 마십시오. 주님의 다스림 받기를 기뻐하십시오. 우린 언제나 죄악 가운데서 살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를 누가 은혜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습니까? 주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를 주인으로 섬기며 주님의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