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47-49  하늘에 속한 자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살지만 사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한시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가령 햇빛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해는 인간이 것이 아닙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인데 그 물을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공기도 역시 인간의 힘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공기가 없으면 우린 죽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 매여 사는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매여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신자든 신자든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연을 날릴 때 연이 하늘을 힘차게 날 수 있는 것은 끈을 통해서 연을 붙들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이 아무리 ‘나는 스스로 날고 있다’라고 큰소리친다고 해도 연은 끈에 매여있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끈이 끊어지면 연은 그 순간 땅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연을 붙들고 있는 것은 연이 자기를 붙들고 있는 자에게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연과는 상관없이 단지 연을 붙들고 있는 자의 열심에 의해서 연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알고 감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햇빛과 비가 선인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도 내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다운 모습과 인간답지 않은 모습이 나오는데 인간다운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감사하는 자이지만 인간답지 않은 모습은 하나님은 무시한 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자를 가리켜서 신자라고 하는 것은 신자는 자기의 힘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분에 의해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살려주는 분에 의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완벽함은 부활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을 만한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헛되고 썩어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는 참된 종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는 우리의 환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이 좋을 때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이것은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헛된 말에 불과합니다. 은혜와 사랑은 환경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현재 우리의 모습에 상관없이, 장애인이든 정상이든 상관없이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자신의 처지가 좋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있음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국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불신자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본문에서는 흙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8절에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라고 말한바 대로 흙에 속한 자는 썩어질 몸을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고 하늘에 속한 자는 영원한 하늘을 소망으로 한 채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려주는 분으로서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바라보고 나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불안한 시선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바라볼 때 믿음에 볼품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낙심을 하게 됩니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래도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편안함과 기쁨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희망도 즐거움도 사라진 채 염려와 걱정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흙에 속한 자는 흙에 속한 자신의 몸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에 스스로 짐을 지게 되고 쓸데없는 걱정과 시기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저런데 나는 이렇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불행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둔 결과입니다.

믿음이란 자기를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몸을 어떻게 만들어 달라는 것은 탐욕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되보기 위해서 행동하는 모든 것은 흙에 속한 자의 모습이지 하늘에 속한 자가 보일 모습이 아닙니다. 신자가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높여야 할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신을 나타내고 높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흙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믿음이 없고 멸망 받을 바라는 평가를 받을 자입니다.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타인을 판단할 때 기준은 자기에게 잘해주느냐 못해주느냐입니다. 자기에게 잘해줄 때 그 사람은 선한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은 보기는 안그렇던데 대해보니까 괜찮더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것이 결국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있는 말입니다. 내가 대해보니까 괜찮더라는 것은 자기에게 잘해주더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에게 선하게 대했기 때문에 괜찮더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지 만약 자신을 욕했다면 분명히 ‘그 사람 대해보니까 안좋더라’는 평가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를 바라보지 않는 흙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잘해주든 못해주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성경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49절에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합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은 아담에 속한 자로 썩어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은 아담에 속한 자로 영원한 죽음에 빠져야 할 우리가 어느 때인가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늘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한 몸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늘에 속한 자를 더욱 사랑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속한 자입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자답게 하늘에 속한 분을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흙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런데 왜 흙에 속한 것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흙에 속한 것 때문에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살려주기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살려보려고 하는 것이 곧 불행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다른 모든 문제는 살려주시는 분에게 맡기고 오직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은혜만 나타내고 살기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이 하늘에 속한 자로서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실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여러분을 통해서 이웃에게 더욱 확실하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