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까지는 출애굽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고린도전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출애굽기에 이어서 고린도전서를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출애굽기와 고린도전서의 어떤 연관성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는 신자는 세상에서 벗어난 존재임을 말씀하는 내용임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벗어난 자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함께 존재하는 사회이지만 그 속에서 신자의 역할은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를 다닌다고 사고방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달라지는 것은 주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주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았을 때 그 사람은 신자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모르고 옛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면서 교회로 모였을 때 그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현재 은석교회의 모습을 점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이고 있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모이고 있는지를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고린도 교회에서 보여졌던 문제가 오늘 우리들에게서 보여진다면 그것은 분명 애굽적인 모습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찾아가며 하나하나 벗어버리기 위해서 다시금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후서와 함께 이 세상에 남겨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점들을 지적함으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에서 보여져야 할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자기를 소개하면서 그냥 '예수의 사도인 나 바울은'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그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한마디로 골치 아픈 교회였습니다. 그중에서 바울에게 직접 연관된 문제는 고린도 교회안에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바울이 말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후 10:10에 보면 "저의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몸도 볼품없고, 말하는 것도 별로 신통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언변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라는 지역은 학문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특히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한 지역인데, 수사학이란 언어를 구사하는 학문입니다. 이런 문화성 때문에 고린도는 언변이 좋은 사람은 존경을 받았고, 언변이 좋지 않으면 천대를 받는 그런 지역입니다. 그런 지역에서 바울이 사도로서 언변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말을 전하는 자입니다. 말을 전하는 자로서 언변이 안좋다는 것은 좋은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현대 교회도 보면 목사를 청빙할 때 설교를 한번 시키면서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판가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를 판가름하면서 그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야 어쨌든 유능한 언변을 구사하면 설교를 잘하는 목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말이 시원찮은 바울보다는 언변이 좋았던 아볼로를 더 존경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의 모습을 알고 있던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어진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도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는 바울이 말이 시원치 않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것은 결국 인간의 재주가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재주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인간의 재능을 바라보는 것은 재능이 있어야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재능이 곧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재능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세상은 재능이 있는 인재를 원합니다. 재능이 있는 자가 재능이 없는 자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능을 갖추기 위해서 여기저기 학원에 다니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단지 인간을 도구로 삼아서 뭔가를 보여주시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재능을 주셔서 그 재능으로 일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재능없는 자만 골라서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이 있든 없든 그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 앞에서는 미련하고 약한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해서 스스로 지혜있는체 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7-28).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자신은 인간을 기쁘게 하고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부름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언변이 좋지 않다고 배척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전파하는 것만이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면 복음을 전파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도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은 사실을 말하고 나서 똑같이 성도도 부름을 입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2절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라고 합니다. 예수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성도라고 말합니다. 사도나 성도나 같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어떤 지위의 격차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사도로서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고, 성도는 성도로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지금은 사도와 성도가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일 뿐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그 누구든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단지 주어진 역할이 목사의 역할, 장로의 역할, 집사의 역할로 각각 다르게 주어졌을 뿐입니다.
부름 받은 자로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잘한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내세우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내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남보다 재능이 못하다고 해서 불만을 가지거나 재능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나서서도 안됩니다. 어떤 신자는 자기에게 재능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고 한탄하면서 재능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착각을 하고 있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겼으면 재능을 줘서 일하도록 하신다는 착각입니다. 둘째는 재능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착각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일의 결과를 눈에 보이는 성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착각에 있기 때문에 능력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언변이 좋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모습 그대로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그모습에 불만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대로 나는 부족해서, 배운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일군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자질이 있기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그 누구도 십자가의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자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섭하시고 일하셔서 우리를 낮추시고 주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도록 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들이 다른 성도들에게는 믿음을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빠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낮추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간섭도 되시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통해서 다른 형제가 믿음을 배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도구로 쓰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만 가지고 그럽니까?'라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시는 것은 거부할 수 없고 그대로 받아야 하는 것이 피조물된 인간인데 어떻하겠습니까? 때문에 제일 복되는 것은 모든 환경을 주님을 배워가는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은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것이고, 그것이 구원받은 신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복을 준비하시고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 복 아닌 것에 대한 소망을 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내편에서는 어떤 조건도 제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건강이 남보다 못하다고 해서, 돈이 남보다 없다고 해서, 남보다 재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 내 모습에 대해서 불만할 수 없는 것이 신자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불만이 기도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건강하지 못해서 봉사를 못한다면 '하나님 건강 주셔서 봉사하도록 해 주십시오. 건강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 덕이 안됩니다' 이 기도는 언뜻 생각하면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건강 때문에 남보다 많은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나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건강을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건강을 기도하기보다는 건강치 못한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를 찾아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같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입니다. 그리고 이 성도가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부름 받았는가를 알고 자기의 것을 내세우지 않음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교모임도 아니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모여진 것도 아닙니다. 은혜와 평강을 서로서로 배워가는 그런 관계입니다. 자기 것을 내세우지 말고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배워가시기 바랍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부름 받은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