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그리스도의 일군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모함을 받거나 욕을 먹거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이 역시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칭찬을 기대하고 삽니다. 인정을 받기를 원하면서 살아갑니다.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 편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땀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계, 자기의 보람, 자기의 업적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에 열심을 냅니다. 때문에 자기가 일한 수고에 대해서 칭찬과 인정이 없을 때 아주 속상해하고 낙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교회 안에서도 많이 보여집니다.

여러분이 교회 일을 할 때 제일 속상한 경우가 언제입니까? 실컷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노력해서 뭔가를 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트집잡고 인정을 안해줄때입니다. 그때는 정말 일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리는 경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반대로 잘한다고 칭찬해주면서 "역시 우리 교회는 ⼐ 집사님이 있어야돼. ⼐ 집사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돼"라고 할 때 그 기분은 하늘을 나는 것 같으며 계속해서 내 돈과 내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인정을 안해주면 일을 안하고, 인정을 해주면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과연 누구 때문에 일하는 것이고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까? 모두가 자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신자가 뭔가를 한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 때문에 스스로 자원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사람이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하든 그것은 관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살기보다는 사람을 보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버리기 힘들었던 유혹 가운데 하나가 설교를 잘해보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위 인기 있는 설교를 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자기가 한 설교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영화배우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인기 있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 유혹에 빠져있을 때는 자연히 사람을 보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목적이 설교를 잘한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실력 이상의 말을 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인기에 손상이 갈 수 있는 말은 삼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설교자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인기 있는 설교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고, 여러분에게 인정을 받는 설교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때를 염두에 두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하고자 하니까 설교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할말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점검이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찮으시다면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다면 사람이 어떤 평가를 하고 욕을 해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힘들겠지만 신자가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자연히 사람의 반응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한다는 것이 사람들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를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 일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체에게 유익이 되는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체를 생각하며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시비를 거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말고 '이젠 아무것도 안한다'라는 쪽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좋은 대로 할 수 없고, 자기 감정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1, 2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교회에서 무슨 헌신예배나 권사취임식, 집사 임직식 같은 경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충성을 말하면서 교회에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충성을 하는 방법은 돈을 바치는 것이고, 시간을 바치는 것이고, 교회 일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듣는 신자들은 교회에 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우선 일군이라는 말부터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군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원, 뭔가 교회의 일을 맡아서 일하는 사람들을 일군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누구를 일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를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일군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를 가리킨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은 돈, 시간, 노력을 바쳐가면서 교회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그런 일군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비밀은 성경이니까 성경을 맡아서 전하는 사람, 즉 목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2:7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1:24절에서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볼 때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요, 십자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만이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압니까?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압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아는 모든 신자가 곧 그리스도의 일군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복종의 차원이다는 것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로를 터로 삼고 그 위에 세워져 가는 성전된 신자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23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이 드러낼 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일군이 할 일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신자가 모여서 할 일은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가 모이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것도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너보다 더 낫다는 식의 자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신자들이 모이면 세상 것으로 살아가고 세상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힘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이 전부이지만, 그래서 세상 것이 있으면 웃고 없으면 낙심하고 염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신자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새하늘 새땅에서 영원히 살 존재들이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울거나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십자가는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두려워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2절에서 말하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도 열심히 맡은 직분을 위해서 일하라거나 열심히 돈 바치고 시간바쳐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여기서 충성은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23절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드러낼 때 교회는 다니지만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반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단체를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 자들 앞에서 십자가는 자신의 열심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분명히 그들에게는 거리끼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한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주님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이 거룩하다는 말은 분명 거리끼는 말입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는 돈이 아니라 내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거룩하게 떠받드는 사람들에게 성전은 예배당이 아니라 우리 몸이라고 말한다면 분명 이상한 신학을 말한다고 떠들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있는 이방인들 앞에서도 세상 것을 욕심 내지 않고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 것은 당연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새하늘 새땅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욕을 먹고 싫어할 것이 두려워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충성되지 못한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도 세상에 뭔가를 두려워한다면 우린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속에서 끄집어내야 할 그리스도를 끄집어 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봉사를 못하고, 헌금을 못하는 것도 뭔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충성은 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한 충성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할 뿐이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하다가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나는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비밀을 말할 뿐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 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직 주님만 판단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지막때 우리를 판단하실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충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