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미국에서 집단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종교 집단인데 그들은 지금 우주에서 자기들을 천국으로 싣고 갈 우주선이 오고 있다면서 자살하면 그 우주선을 타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믿고 자살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자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내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냥 사이비 종교의 문제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할 것은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서 온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사이비 종교로 들려지는 말들이 왜 그들에게는 사실로 여겨졌고, 그것을 또 믿었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정도의 믿음입니다.
굳이 이 사건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우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일어난 오대양 사건도 그와 같습니다. 또 집단 자살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주라고 하는 한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재산을 팔고 바치면서 순종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냥 광신으로 봐 넘겨야 합니까? 문제는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이 아니라면 분명히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입니다. 인간의 교육에 의해서 만들어진 믿음이다는 것입니다. 반복된 교육 속에서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쇄뇌교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스스로의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가 여자로 살고 싶어서 '나는 여자다'라고 하면서 여자의 행동을 계속할 때 자신을 진짜 여자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철저하게 반복된 교육에 의해서 발생되는 믿음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확신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이야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의심을 가르치는 신자들에게 '왜 의심을 하느냐,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신자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신자다. 걱정 말고 구원의 확신을 가져라'고 반복해서 외쳐대고 가르칠 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구원받은 신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점검도 없이 반복되는 교육의 결과에 의해서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잘못이라는 것은 평안할 때는 들통이 안나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당장 들통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사는 자라면 이미 주를 바라보고 사는 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육에 의해서 믿음의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은 조그만 문제에서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몸챙기기에 급급한 모습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은석교회에서 다른 교회와는 뭔가 다른 설교를 계속 들음으로 인해서 스스로 나는 다른 신자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다른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고급신앙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교육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점검하는 점검표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사도를 대단하게 여깁니다. 우리하고는 뭔가 다르게 능력도 있고, 믿음도 더 세고, 또 위대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사도들같이 위대하고 능력있는 그런 신자가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위대하고 능력있는 신자 되는 것을 꿈꾸는 이유는 신자들 사이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그런 신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은 착각이다고 합니다. 9절에 보면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뛰어난 것을 좋아하고 신앙의 수준도 이러한 능력과 실력으로 가늠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들은 위대한 사도는 하나님이 그를 높이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도인 자신들을 가장 비천하고 연약한 존재로 세워두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모습입니다.
지금 많은 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자의 모습은 고린도인들과 같습니다. 신앙 생활에 열심이고 믿음이 좋은 신자는 하나님이 분명히 뭔가 다르게 대우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높이 들어 쓰신다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무조건 복을 받아서 잘돼야 하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도 바울조차도 만물의 찌끼 같은,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좋은 대접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신자란 누구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도대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가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대접받은 그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가 신자를 잘못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올 때도 하나님께만 나오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복을 받고, 만사가 잘되고,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자 위에 군림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말하면서 아니라고 반박을 합니다. 사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10-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한 덕분에 받은 대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유대인 사이에서 실력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며 살았을 바울이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결과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는 불평 한마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교육이 아니라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된 믿음입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이 있고, 천국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으로부터 비방을 당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어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하는 일들이 신경쓸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복음을 알게 할까' 여기에 모든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관심이지 세상에서 어떻게 사나,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나, 여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이며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세상적인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은 세상에서 위대한 자 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물의 찌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셔서 천국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관심 둘 것은 사도와 같은 그 모습으로, 사도와 같은 그 마음으로 내가 만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까이지 세상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사도의 마음으로 신자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생활의 여유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다른 형제의 생활의 여유와 세상의 잘됨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기도를 하는 자신부터 세상의 여유와 풍족한 삶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세상을 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의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온통 주님의 채워지고 천국으로 가득 채워진 사도의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런 기도도 하고 생활의 여유를 위해서도 기도하면 안됩니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음을 안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십자가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만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도의 모습으로 사도의 뒤를 따라가는 신자입니다. 전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한 것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은 더 헌신하고, 더 봉사하고, 더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미말의 자리에서 살고자 힘씁시다. 찌끼 같은 존재로 살고자 힘씁시다. 그것이 사도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고, 그러한 모습이 십자가를 드러내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