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21 능력

오늘 오전시간에 축복을 말씀드리면서 요즘 현대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모습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구별된 모습이 없다는 것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힘을 쓰지 않는다거나 나라의 경제 발전과 정의를 위해서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드러난다는 데서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한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의 차이점입니다. 그 차이점을 잘 구분할 때 신자가 세상에서 구별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은 같은 하나님을 말하고 같은 믿음을 말하고 같은 십자가를 말을 해도 각각 달랐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복주시고, 만사 형통하게 하시고, 세상에서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자들은 그만한 대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바울이 말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라 할지라도 특별히 세상에서 위대한 모습으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말에 두시고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드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말하는 신의 모습이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세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뭐하러 믿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공격하거나 부끄럽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뭔가를 깨닫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15절, 16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바울은 무엇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흔히 교회에서 성경의 인물을 들어서 누구를 본받자는 강조를 많이 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면 이삭을 바친 믿음을 본받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자신에게 귀한 것을 바치자고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돈 문제로 들어가고,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문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욥을 말할 때는 욥과 같이 인내하자고 말합니다. 인내하면 하나님이 두배의 축복을 주시니까 어려워도 인내하자고 강조합니다. 성경의 인물을 모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되라고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본받으라는 것인지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호하기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이 바울과 같이 전도를 많이 하자거나, 기도를 열심히 하자거나, 봉사를 하자는 어떤 뚜렷한 방향과 목적이 없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울의 의도와는 다른 강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할 때 과연 무엇을 본받기를 원하겠습니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럼 여기서 고린도 교회가 능력으로 생각했던 것과 사도 바울이 능력으로 생각하는 것의 차이점을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령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능력으로 생각한 것은 모두가 은사였습니다. 방언하고, 통역을 하고, 병을 고치는 등 어떤 특이한 현상을 성령을 받은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했고, 그 능력이 주어진 자들은 스스로 능력있는 자로서 행세했던 것입니다. 즉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생각했던 능력과 사도 바울이 생각한 능력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능력을 말할 때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특별한 힘을 능력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힘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힘을 능력이라고 여깁니다.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 힘을 능력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보다 더 큰 힘을 얻기 위해서 능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기도를 유창하게 하면 나도 능력을 받아 가지고 저 사람보다 더 유창한 기도를 하고 싶어하는 것, 이것이 자기 과시하고 싶어하는 욕망 아닙니까? 옆에서 큰 예배당을 건축하니까 나는 그보다 더 큰 예배당을 짓겠다고 하면서 '하나님 능력주시옵소서'하는데 이것이 곧 자기 욕망 아닙니까? 그러한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능력은 헌금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것이 능력이라면 세상에는 그런 능력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힘을 싫어했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힘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들어서 말고의 귀를 쳤을 때도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검을 쓴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힘은 십자가와 반대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힘의 차원으로 주어지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뭔가 힘을 구축해 보려는 것은 십자가를 전혀 모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20절을 말씀을 가지고 소위 교회에서 말많다는 교인들을 억누르려는 것도 전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주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세상 사람은 나타낼 수도 없는 능력입니다. 바울의 능력은 지난 시간에 얘기했던 대로 미말에 자리하고,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말로 자기를 낮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의 뜻과 욕심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있게 한 자리에서 주님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힘쓰며 사는 것입니다. 조롱거리가 되게 하셨으면 조롱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자기를 포기한 것, 이것을 가지고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같이 대우도 마다하지 아니한 것은 바로 자기를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한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 자기 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 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만 주시면 우리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능력을 구하십시오'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하고 있고, 12절에서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합니다. 결국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풍부든 궁핍이든 상관없이 어떤 형편 속에서도 자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풍부하다고 교만하지 않고, 궁핍하다고 원망하지 않고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가지고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능력은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항상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처한 형편이 고통이고 어려움이라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즉 말만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아비와 같은 자는 적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진심으로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과 같이 능력을 자기를 과시하고 신앙적인 우월감을 내세우는 것으로 오해하여서 우리 또한 뭔가 내 자신을 과시하고 내세우려고 하는 모습은 없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 받은 자의 모임입니다. 성령이 함께 한 자들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포기한 겸손의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참된 신자다운 모습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