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죄라고 하면 하지 말라는 무엇을 한 것을 연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문제 가운데 하나인 음행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냥 음행이 아니고 1절에 보니까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비의 아내란 생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첩이나, 계모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것을 이방인중에도 없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교회는 이런 일이 없으니까 괜찮은 교회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단순히 음행을, 그것도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면 그런 일이 없는 교회나 신자들은 모두 이 말씀 앞에서는 큰 소리 칠 수 있고, 당당하게 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단지 음행의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행의 사건은 하나의 예로 등장을 하고 있고, 정작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러한 음행의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가만히 놔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하듯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음행을 행한 자를 가만히 놔두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고 실수 한 번 하지 않을 사람들만 골라서 모여진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교회에도 얼마든지 실수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 실수를 그냥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실수를 그냥 용납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가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아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교회로 모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거룩한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교회답게 그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거룩성을 지킨다는 것은 세상의 삶의 방식을 교회에 끌어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하고,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은 신자들은 교회에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자로 부르셔서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단지 나 하나를 천국 보내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만약 나 개인에게 초점이 있다면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 집에서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모임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모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이 모임의 중요성보다는 나 개인에게 중요성을 두고 있습니다. 나하나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 보이지 교회라고 하는 거룩한 모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내가 불러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교회를 위해서 자신은 희생돼야 하고,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교회가 자기를 위해서 희생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음행한 자를 물리치지 않고 있다고 책망하는 것은 무조건 쫓아내야 하는데 쫓아내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가 죄와 죄가 아닌 것은 분명히 구분해서 가르쳐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한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죄에 대해서 책망이 없을 때 그 교회에 모이는 신자들은 죄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고린도 교회는 스스로 '우리는 능력이 있고 신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신령한 은사가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음행한 사람을 물리치지아니한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신령한 능력이 있고, 은사가 있으니까 우리는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가 있으면 은사가 있는 신자로서 어떤 삶이 합당하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있으니까 다른 행동은 상관없이 옳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살아가는 모습은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이 욕심껏 살아가면서도 교회 다닌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신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 내에서도 다른 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는데 십일조하고,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나는 신자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주님의 마음에 들게 살지도 못하면서 어떤 체험 하나를 가지고, 또는 주일이면 빼먹지 않고 예배당에 나오는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다해 버리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가 교만하여서 음행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뭔가 잘하는 것 하나를 드러내놓고, 그것만 있으면 다른 잘못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살아가면서 구제하고, 선교하고, 환경운동,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죄나 실수도 그것으로 다 덮어버립니다. 이러니 무슨 교회의 거룩성이 지켜지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죄를 지은 한 개인에 대한 처리 방법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분명한 구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서 분명한 구별을 하지 않으면 앞서 말한 대로 신자된 여러분은 죄에 대한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죄에 대해서 단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그대로 드러낼 때 여러분은 교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가 될 것이고, 행동 하나하나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전혀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껏 알아봐야 주일에 교회 빠지는 것, 십일조 안하는 것 등 몇가지가 아닙니까? 제가 죄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교회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특히 죄가 가장 잘 감춰지기 쉬운 종교 행위를 자주 말씀드리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결코 여러분에게 시비걸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신앙행위 몇가지가 여러분의 전부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절에 보면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애매한 말입니다.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교회의 모임에서 쫓아낸다는 것인데 이것은 음행한 자를 어떻게 하라는 규범으로 주어진 말이 아닌 줄 압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본문은 한 개인의 죄에 대한 처리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절도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의도로 봐야 합니다. 여기서 육이란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사고방식, 즉 옛성품을 말합니다. 교회는 옛성품을 물리쳐야 합니다. 옛성품은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이 교회의 거룩을 지키는 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죄지은 자는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옛성품을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한 곳임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옛성품을 가지고 교회에 오려거든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말까지 거침없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교회는 옛성품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의 옛성품의 모습에 대해서 점검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부터 나오는 누룩도 옛성품, 즉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교회에 퍼질 때 교회의 거룩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나 혼자 천국 가기 위해서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지는 것은 내가 교회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교회로 비춰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혼자 예수 믿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거룩한 모임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기에 힘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