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20 몸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는 바울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바울의 말을 들으면 어떠한 느낌을 갖게 됩니까? 단지 '야! 역시 바울답게 믿음이 좋다'라는 느낌만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바울의 이런 말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라는 존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오로지 주님이 계실 뿐이지 자기 개인은 없었습니다. 몸도 내 몸이 아니요 주님의 몸이었고 인생도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태어난 것임을 깊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있고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바울 앞에서 우리는 흉내만 내고 있는 우리들의 믿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끄러움과 함께 우리의 모든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있는 척 했고, 나만큼 주님을 위해서 봉사한 사람도 없다는 착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바울의 삶은 온전히 주님께 점령당한 신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항상 우리는 '나'라고 하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서 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떠벌립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라고 하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부부간에도 자기에게 관심 가져주기를 바라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때는 실망과 섭섭함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은 이것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는 것은 그 일부된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의 몸에는 팔, 다리 등 여러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부분들은 몸을 위해서 일합니다. 팔은 팔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몸 전체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부분들이 몸을 위해서 존재할 때 비로소 몸이 몸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일부인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로 모였을 때 여러분이 가져야 할 관심은 여러분 개인이 아니라 교회, 즉 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이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로 모였는데도 여전히 자기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은 통해서 신자의 몸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시 음행을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음행을 저지른 것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다른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음행을 가지고 '네가 몸이 무엇인가를 모른다'고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당시 고린도 교회가 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헬라사상의 하나인 이원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원론이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구원이란 영이 육신에 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혼은 구원을 얻었는데 육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몸의 자유를 누렸는데 그 자유가 음행까지 가게 한 것입니다. 몸은 어차피 썩어질 존재에 불과하니까 몸은 뭘해도 영혼만 신령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 셋을 데리고 기도하러 겟세마네란 곳에 가셨는데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 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하는데 육신이 약하니까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뭔가 못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마음은 원하고 있다는 것으로 스스로 안위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면서 죄속에 있는 것을 당연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이원론과 흡사한 모습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잘못 생각한 것은 생각이 신령하면 몸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유를 오해한 것입니다.

12절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같이 영이 구원을 얻었으면 몸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의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일은 다 가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 안에는 너희가 지금 누구의 몸으로서 살아가느냐를 묻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위해서 한다면 모든 것이 가하지만 너희 자신의 몸을 위해서 하는 것은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13절에서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은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의 몸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는 문제로 나아갑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의 몸이 최고의 관심입니다. 먹는 것도 몸을 위해서 먹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 몸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몸도 아니고, 세상 즐거움을 위한 몸도 아니고 오직 주님을 위한 몸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몸된 나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몸을 위하신다는 것은 주님의 몸으로 살아가는 나를 위하신다는 것이지 내 욕심을 위해서 살아가는 나를 위하시는 주님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님을 아십니까? 19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은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몸을 사용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보다는 내 욕심을 위해서 몸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보다는 내소유가 늘어가고 내 욕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원하는데 육신이 약하다'는 말로 자신을 핑계대기에 급급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로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창기와 함께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몸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몸을 사용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한 자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한 자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신자답게 살고 있습니까? 항상 스스로 이것을 물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두라는 것입니다. 목사 되고 선교사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목적을 두지 말고 하늘에 모든 소망과 목적을 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손해도 감수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저와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생각만 천국을 바라보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천국을 향해있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다면 그 모습이 자신의 몸을 통해서 보여지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종교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몸된 나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기고, 높아지고, 많이 소유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고, 손해보고, 양보하는 자리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삶은 자기를 위한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보여질 수 없는 모습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산다면 비록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죄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누구에게 붙들린 삶인가를 살피십시오. 주님께 붙들린 삶인지,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욕심에 붙들린 삶인지를 살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된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성령의 전인 몸이 진심으로 주님을 위한 몸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