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24 부르신 그대로

신자가 신앙생활하면서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아는 것은 제대로 인데 그 아는 것이 실제 생활에서 체험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복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진짜 복으로 느껴지고 예수님만으로 기뻐하며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이 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세상이 좋고 돈이 좋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닌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들의 이중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그러한 모습을 잘 알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이중성을 주님 앞에 나와서 드러내고 주님께서 고쳐주기를 간절히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이중성을 감추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속은 아니면서도 겉으로는 주님이 좋은 척, 세상보다는 주님만 사랑하는 척하기 위해서 어떤 위선적인 종교행위를 끄집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은 교회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고침 받기 위해서 나오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러면 우리의 잘못된 점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용서를 구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바로 주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솔직한 신앙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눈에 보인다면 사람 눈에 자신의 신앙이 좋게 보여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솔직한 신앙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안그런척하고 감추려고 하지 말고 잘못된 것은 솔직하게 드러내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신자는 다같이 죄인입니다. 누구하나 더 낫고 덜한 것이 없는 같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쳐라'고 하셨을때 모든 사람이 더 도망한 것 같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도 누구하나 남을 정죄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남의 눈치 보면서 신앙이 좋은 척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신앙의 약함을 감추려고 하게 되면 결국 어떤 핑계가 나오게 되는가하면 환경을 탓하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탓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빠서 교회를 나오지 못한다면 솔직하게 '내가 요즘 예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해서 자꾸 교회를 멀리하는데 큰일났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그게 아닌데 요즘 너무 바빠서 교회를 못나옵니다. 하지만 몸은 교회를 못와도 마음은 항상 교회에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자신을 변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바쁜 것이 무슨 장애물이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또 신앙이 좋은 척 보이려고 교회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분명 잘못입니다. 지금 교회를 나오느냐 안나오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부족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경연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일등, 이등, 삼등을 뽑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때문에 교회에 와서 신앙을 자랑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신앙의 연약함을 감추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의미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중점적인 말은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로 드는 것이 이혼과 할례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혼 이야기를 하면서 이혼을 하는 것이 옳다 그르다거나 또는 이혼을 했으면 재혼을 하는 것이 옳다 그르다는 식으로 어떤 규칙을 세우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항상 그랬습니다. 규칙을 세우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대로 독신이냐 결혼이냐는 문제에서도 바울은 독신이든 결혼이든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규칙으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즉 독신을 주장했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은 신앙이 좋은 것이고, 결혼을 한 것은 신앙이 좋지 못한 것이다는 식의 규칙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이런 경우에는 이혼해라는 규칙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세워두었던 규칙을 허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남자만 여자를 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남자를 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혼이 성행했었는데 이혼하는 이유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또는 여자와 살기 위해서 지금의 남편, 아내를 다른 핑계를 대어서 이혼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핑계가 신앙적인 이유를 대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소위 믿지 않는 남편, 아내이기 때문에 갈라선다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또는 신앙의 경건성을 이유로 내세워서 믿지 않는 상대방을 버리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지적합니다. 즉 믿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부분의 경우가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한다거나, 아니면 시댁식구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혼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런 생각으로 자신의 신앙의 약함의 원인을 모두 외부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신앙의 경건성을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16절에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는 너를 통해서 믿지 않은 식구가 구원을 받을지 어찌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묵인하고 장려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들으면 곤란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불신자와의 결혼을 장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주 깊은 정이 들어서 도저히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결혼을 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불신자와 결혼하면 그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이지만 적어도 믿는 신자는 평생을 그 책임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불신자인 상대방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감수할 각오를 가지고 해야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어쨌든 이것은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신앙이란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환경을 개선하고 바꾼다고 해서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문에서도 할례자는 무할례자가 될 필요가 없고, 무할례자는 할례자가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든 무할례든 그것이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는 굉장한 표였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이 백성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할례든 무엇이든 외적인 것이 우리의 신앙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할례를 받았으면 할례를 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이든 자유자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 때 그자가 곧 할례자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자입니다.

우리는 자꾸 환경이 나빠서 신앙 생활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마치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환경 탓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진짜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어떤 환경도 공부에 방해는 되지 못합니다. 물론 불편한 점은 있겠죠. 하지만 방해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환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환경이 이랬으면 내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자신의 신앙이 약한 것은 하나님 책임이라는 묘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면서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이 안좋으면 그것은 신앙생활에 약한 힘들고 불편한 점은 있겠지만 그것이 방해되어서 신앙생활을 못한다는 핑계를 대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떤 환경도 주님을 찾는 믿음을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은 여러분에게 꼭 맞는 환경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적당한 환경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환경의 핑계를 대지 마시고 주어진 대로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는 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최선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신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를 바라보면서 가질 수 있는 억울한 마음이 사라지고 평안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다 주셨습니다. 단지 이웃과 내가 받은 것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교하면서 억울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억울하지 않은 척하려고 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애써 관심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솔직하지 못한 마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억울함이 있다면 '하나님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 인줄 압니다. 이것을 고쳐주시고 주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적의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가십시오. 이것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신자의 삶입니다. 자유를 잃었다는 것은 세상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으로 비교하거나 경쟁하려고 하지 마시고, 신앙의 행위를 비교하거나 경쟁하려고도 하지 마시고, 어떤 자리에서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대로, 부르신 그대로 사는 것이 자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