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성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임을 말합니다. 즉 자신에게 고린도 교인들이 원하는 사도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불러 사도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입어서이지 결코 어떤 인간의 조건을 갖춤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도 하나님의 부름을 입어서 성도된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즉 너희들이 지금 사도의 조건을 따지고 있지만 내가 부름을 입어서 사도된 것 같이 너희도 하나님의 부름을 입어서 성도된 것이지 성도될만한 조건이 있어서 성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나 잘났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자꾸 자신에게서 뭔가 자격이 될만한 것을 찾게 되면 끝내는 실망만 하게 될 것이고, 혹 자격이 될만한 것을 찾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과 남을 구별하게 되어버립니다. 때문에 성도는 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입었다는 것을 항상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자신을 내세우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행해서 책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7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합니다.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은 은사가 풍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습니다(5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지 못해서 안달을 합니다. 은사만 받으면 신앙생활은 저절로 되어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은사를 받는 것도 은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를 신자의 능력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앞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을 감사한다고 말하면서 왜 뒤에는 주께서 너희를 견고케 하신다고 말합니까. 결국 이 말은 고린도 교회가 은사에는 풍부했지만 그 은사가 그들을 지키고 견고케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은사로 인해서 교만으로 나아갔고 다른 성도들과의 구별로 나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감사하는 것은 그런 고린도 교회이지만 주께서 그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켠고케 하실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름 받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책망을 시작합니다. 책망을 하는 것은 그들이 부름 받은 거룩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이지 성도가 아니라면 책망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바로 나 자신이 책망을 받아야 하며 내가 책망을 받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부름 받은 성도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성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예배에 나오는 것이고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지 성도가 아니라면 이 시간에 여기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책망은 하나님의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기 위한 회초리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지적하는 가장 첫 번째는 분쟁에 대한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합니다. 분쟁, 즉 싸움이라는 것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습니다. 나 혼자 사는 곳이라면 몰라도 둘 이상이 만나고 모인다면 그곳에 분쟁은 필연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교회라고 해서 분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분쟁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서로 싸우지 맙시다'고 강조하고 넘어가면 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말자는 말한마디에 싸움을 그치는 그런 괜찮은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싸움을 그냥 넘어가도 안되고, 싸우지 말라는 말도 소용이 없다면 바울은 왜 분쟁에 대해서 말합니까?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고 타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점이 있으면 그 문제점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파헤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그들이 뭔가를 오해해서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분쟁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왜 분쟁이 있게 되었는가를 말하고 나서 그것이 왜 잘못된 생각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차원에서 분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리도 교회는 지금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서로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주장을 했는데 그 근거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를 가지고 따졌던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으며 내가 죄인이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운명에 뛰어든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세례의 중요한 의미인데 이들은 그러한 의미에는 전혀 관심 없고 단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을 가지고 자신의 자랑으로 내세우고, 그것으로 서로 다퉜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바울은 사도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받은 세례가 더 세례다운 것이 아니냐'라고 하고, 베드로에게 세례 받은 자는 '아니다 바울보다 베드로가 더 낫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아니냐. 그런 자가 어떻게 사도냐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세례 받은 것이 더 세례다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세례 베푼 자를 내세운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것인데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 받았느냐를 가지고 다투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모습은 많이 보입니다. 사회에서 유력한 자와 연관이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해도 사회에서 유명한 목사를 부르려고 합니다. 말씀에는 관심없이 사회의 지명도를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담임목사와 부목사, 전도사가 있는 교회에서는 자기 집에 심방을 와도 담임목사가 오기를 원하지 전도사나 부목사가 오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담임 목사가 더 능력이 있고, 더 위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든 전도사든 말씀을 전하는 것은 자기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을 전할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전한다면 담임 목사가 전하든 전도사가 전하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복음만을 바르게 전한다면 누구든 그 권위는 말씀에 있는 것이지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담임목사, 부목사라는 직책에 매여버릴 때 고린도 교회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목사보다는 담임목사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지체가 모여서 한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체는 서로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손과 발이 비록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손과 발이 서로 싸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손과 발이 서로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내리는 지시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한 지시를 내리지 어떤 한 부분을 위해서 지시를 내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는 자기 개인의 생각으로 움직여서는 안되고, 또 자기를 위해서 움직여서도 안됩니다. 오직 몸 전체를 위해서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입니다. 지체가 서로 싸우는 것은 다른 몸이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가 교회라고 하면서도 서로 파를 나누고 분쟁을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안에서는 우리는 다 똑같은 존재입니다. 손이다, 발이다는 식으로 뭔가 맡은 일을 다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일합니다. 손이라고 해서 발보다 나을 수 없고, 발이라 해서 손보다 못할리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지체일 뿐입니다. 목사도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도도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똑같이 부름 받은 성도로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목사가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목사가 없어도 십자가를 아는 부름 받은 성도들이 모인다면 교회입니다. 조직이 있어야 교회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조직이 교회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지체로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보지 않고 목사를 본다는 것은 결국 고린도 교회와 같은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쟁이란 주님을 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바울은 13절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알고 교회에 온다면 우리의 관심은 죄용서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용서가 필요한 자임을 알고 교회에 나올 때 내가 누구에게 세례 받았느냐는 것을 따지고 내세우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오면 내가 누구냐,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는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회에서야 주어진 위치 때문에 힘을 행사하고 존경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교회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사회에서 힘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서도 그 힘을 행사하고 싶어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입니다. 세상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교회입니다. 세상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세상의 힘을 내세우고, 세상의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고집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교회에서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것에는 관심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 받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 올 때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겠습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을 두고 와야 합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문제될 것도 없고, 나에게 세상의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십자가가 관심이 아니라 여전히 나에게 관심을 두고 교회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 것을 자랑하는 것 같이 어리석은 자도 없을 것입니다. 또 그 자랑하는 사람 때문에 괜히 마음에 시기가 일고 상처가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관심이 주님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는 내 죄만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이번에 집샀는데 그것이 많이 올랐습니다. 다 예수님 덕분입니다'라고 한다면 그처럼 바보 같은 신자가 어디있겠습니까? 주님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나같은 죄인도 없습니다. 말씀을 알면서도 또 내 생각대로 내 멋대로 살았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천국간다면 그것은 다 주님의 십자가 덕분입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분은 바울도 아니고, 담임 목사도 아니고, 여러분의 부모님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죄를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키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17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보냄 받은 것은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언변이 좋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재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세상에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이 곧 십자가를 헛되이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한몸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는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에만 관심을 두고 모일 때 분쟁보다는 십자가의 사랑이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