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5 신앙의 원리

지난 시간에는 우상 제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혹시 '우상 제물을 먹어도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뭔지 모르게 반감을 가지고 듣기 싫어하시는 분이 계셨을지 모르겠지만 일부러 시비를 걸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한 말을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인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결국 성경보다는 자신의 지식이나 전통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분명히 우상 제물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상 제물이 죄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약한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어떤 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 법을 초월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형제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유란 자기의 편리함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원리입니다. 자유는 형제의 유익을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9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권리가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8장부터 11장까지는 우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중간에 갑자기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권리가 있으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바울이 사도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직을 의심하는 무리가 발생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바울의 말은 사도직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먹지 말라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바울은 아직 우상의 문제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사도라고 하는 사람이 아직도 우상 문제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우상 제물을 먹지 말라고 하느냐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 모든 말을 쉽게 금방 이해하였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린도 교회도 그들 나름대로의 지식과 습관과 전통 속에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울의 편지 하나로 쉽게 해결되라는 생각은 조금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간섭하시면 금방 깨닫게 되겠지만 대부분은 자기의 지식과 고집을 기준으로 해서 바울의 말을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리 성경 그대로 말을 해도 자신의 지식과 전통을 고집하시는 분들은 반대하고 거부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성경을 그대로 말하는데 왜 안믿나는 생각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얼마든지 우상 제물도 먹고 마실 수 있는 지식도 있고 권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먹지 않는 것은 약한 형제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며 자기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5절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결혼의 문제 때문에 바울에 대한 의심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독신을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영이 구원을 받으면 육은 무엇에도 구속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헬라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말하는 독신을 여자문제 조차 해결하지 못한 금욕주의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직을 의심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또 6절에 보면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 합니다. 아마 바울이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일을 함으로서 생계비를 해결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생계비를 요구하지 못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바울이 사도직을 의심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사도로서 교회에 생계비를 요구할 권리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바울이 이 권리를 쓰지 않고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12절에 보면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권리도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원리였습니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15절의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바울은 자신이 자랑하는 것이 헛된 것으로 돌려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즉 십자가의 복음이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려고 하겠습니까? 단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사도의 위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남이 자기를 의심하든 말든 충분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굳이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사도직이 의심을 받을 때 복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위해서 사도직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이 목사인 저에게도 많이 해당이 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신자들은 목사라는 직책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즉 목사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무조건 절제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때로 거지가 목사를 찾아와서 돈을 요구할 때도 '당신은 내 요구를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식으로 요구합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찾아왔는데 목사라면 당연히 내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신자들도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간혹 목사가 할 필요가 없는 얘기까지 해야 할 상황에 이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굳이 증명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도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고, 결혼할 수도 있고,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수도 있다'이런 말을 바울로서는 사실 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로서의 권위가 부인되면 복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기가 사도임을 증명해야 하는 바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일했는가하는 것을 자랑하면서 그 자랑을 무익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고후 12:1). 아무 유익도 없는 자랑을 할 수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사도권이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자는 목사에 대한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무익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제가 원해서가 아니라 목사에 대한 여러분의 쓸데없는 요구와 기대와 오해 때문에 무익한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전에 목사의 말투 때문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가기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은 분명히 여러분의 복음을 위해서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신앙에 대해서 오해하고 계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신자들은 신앙이 있으면 자신의 성격도 말투도 표정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목사가 말투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목사가 자신이 한 설교를 실천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제 염려는 목사인 제 자신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 불신이 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 대한 불신이 있으면 '저도 하지 못하면서 말만 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설교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당사자에게는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들의 잘못은 목사가 복음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꾸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하는데서 발생한다고 봅니다. 교인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목사상이 과연 복음에 합당한 것인가를 점검하지도 않고 교회라는 자기 직장을 지키기 위해서 교인들의 요구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목사의 부패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이 중심이었습니다. 형제의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도 포기하고 고린도 교인들의 요구도 묵살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오직 복음만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라는 한 인간을 알고 따르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알고 주님만 따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하고 기대해야 하는 목사는 바로 이런 목사입니다. 자기를 알리고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가 아니라 오직 복음만 알려주고 주님만 알게 해주는 목사가 여러분에게 유익된 목사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부름 받은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복된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여러분의 완성을 위해서 여러분을 도와라고 세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바른 진리보다는 엉뚱한 것에 관심을 두고 힘을 소비한다면 어떻게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겠습니까? 목사에게 쓸데없는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무익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직 서로서로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권을 포기하는 일에 힘쓰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