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죄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즉 여러분 자신의 죄에 대해서 결코 얕잡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생각해 버립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관심을 자기에게 두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그후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오로지 자기를 위한 행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심지어 죄는 선을 가장해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죄를 보지 못하면 결국 죄속에 살면서도 죄가 아닌 것으로 여겨버리는, 즉 스스로에게 속아 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깊은 본성 속에서 나오는 죄를 말씀을 드릴때마다 때론 여러분이 선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죄로 규정하면서 말씀을 드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개인적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적이 있었을 줄로 압니다.
사실 이러한 점이 저를 무척 고민스럽게 만듭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죄의 본질을 말씀드리면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점검하고 잘못된 것을 알아챌 수 있다면 좋겠는데 제가 보기에 아직 거기까지는 부족하다고 보여집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내리는 데 부족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체적인 답을 목사인 제가 내려드리는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목사가 구체적인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개인생활을 예로 들어서 언급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자신의 삶속에서 잘못한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생활을 언급할 때 혹 거기에 해당되는 분이 목사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고 지적 받을 때 그것을 기분 좋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았다면 얼마든지 회개하고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남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일단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자체를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목사는 전혀 감정을 두지 않고 지적하고 책망하겠다는 의도도 없이 단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성경적이 아닌 모습을 말씀드리겠다는 것뿐인데도 신자들은 쉽게 오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제가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설교를 들을 때 목사 개인의 말로 듣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는 목사라는 인간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는 전달자만 있을 뿐입니다. 전달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특별한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것도 아닙니다.
사극을 보면 임금의 지시사항, 즉 어명을 집행하는 관리가 어명을 가지고 누군가를 찾아갔을 때 어명을 받은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어명을 전달하는 관리의 말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까? 어명을 전달하는 관리에게 꿇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명입니까? 어명입니다. 어명이 자기를 책망하는 말이라고 해서 그 관리에게 '네가 나를 책망하느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임금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명은 비록 임금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지만 임금이 나타나서 직접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때문에 어명을 듣는 것이지 관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가 이와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을 전달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목사인 저의 말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제 말을 한다면 저는 목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에 힘씁니다. 그것이 저의 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그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떤 말이든 성경 그대로의 말씀이라면 목사에게 감정 가질 필요 없이 순종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이고 그것이 신자의 모습이며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굳이 드리는 것도 아직까지 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신앙생활하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눈치 본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치 보십시오. 여러분을 천국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인데 무엇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사십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설교를 목사 개인의 사상이나 주장으로 듣기 때문에 목사의 말에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자신의 유익에도 해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라면 설교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설교가 성경적이냐 성경적이 아니냐를 판단하는 지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설교를 듣고 성경적 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부할 것은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아가서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떠한 지적도 감정적인 문제없이 들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여러분은 자신을 점검하며 참된 신앙인의 길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도 목사 한 개인의 신학사상이나 주장으로 들어버리면 반감을 가질 만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본문을 읽었을 때는 별다른 반감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경을 통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어떤 형식도 초월했다'는 내용입니다. 20-22절을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신앙의 어떤 형식이나 규칙이 없습니다. 모든 형식을 초월하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형식을 무시하지는 마십시오. 형식을 무시하는 것이 형식을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고 전도를 해야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교회의 본질이 선교, 구제, 전도, 예배, 이런 것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선교를 하면 교회다' 맞습니까? 틀립니다. '구제를 하면 교회다' 역시 틀립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면 교회다' 이것 역시 틀립니다. 뭔가 반감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분명히 제가 본문을 통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말씀을 드리면 반감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제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종교상식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선교나 구제나 예배 등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어떤 형식이나 규칙도 십자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정신 안에서 희생의 마음으로 모여진 그 무리가 교회입니다.
이 희생과 섬김이 선교로 증명되고, 구제로 증명되고, 예배로 증명되는 것입니까?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선교이고, 구제이고 예배이고 기도입니다. 이것이 형식을 초월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꾸 교회의 모습이나 신앙의 모습을 형식화하고 규칙화하기 때문에 엉뚱한 것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을 무시하지는 마십시오. 무시가 아니라 초월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선교, 구제라는 형식에 매이지 말고 초월하라고 했다고 해서 선교를 하지 말고 구제도 하지 말면서 마음대로 살아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흔히 형식을 초월하라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형식을 초월하는 것은 무시가 아닙니다. 바울이 형식을 초월했던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형식을 초월하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절제하는 초월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초월이 아니었습니다. 형식을 초월한다는 것은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형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고 십자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형식을 벗을 때는 벗고 필요할 때는 형식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기 편안과 이익을 위해서 형식을 초월하는 것은 초월이 아니며 자기 욕망을 따라가는 탐욕에 불과합니다.
예배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피곤하면 얼마든지 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자유로 여기고 실컷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몸을 사용했으면서 그 피곤을 핑계삼아서 상습적으로 예배에 빠진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따라 산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자유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자유이며 형식을 초월하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수 있지만 받지 않은 것, 결혼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것,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평생 먹지 않겠다고 한 것, 이 모두가 자신의 영광이나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원리이며 바울이 누렸던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의 행위를 자기의 의로 내세우게 됩니다. 즉 자신이 형식을 초월했든 형식을 잘지키든 그 목적이 자기의 의에 있다면 결국에 자기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절제하며 살아갈 때 그것을 자기의 의로 여겨버리면 자기보다 풍족하게 사는 사람을 타박하게 됩니다. 자기의 절제가 의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절제한다는 것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 그 속에 자기가 아니라 형제가 들어있는 그것 때문에 선이 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 절제하는 것도 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한 절제일 뿐입니다.
바울은 형제에게 양보하고 져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준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대할 때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판단하려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형식을 초월하고 자유를 누리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자유가 자기 쾌락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조심하시면 됩니다. 피곤하시면 얼마든지 예배에 나오지 않고 쉬실 수 있습니다. 생활비가 부족하시면 얼마든지 헌금도 안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피곤하는지, 무엇 때문에 생활비가 부족한지를 물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서 피곤하셨다면 얼마든지 쉬십시오. 주님께 헌신하느라고 돈이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헌금을 안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자기 몸을 위한 피곤이고, 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헌금을 안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자기를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예배를 권장하고 헌금을 권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유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자유의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하시고 진짜 주님께 영광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하실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