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모든 형식과 규칙을 초월한 사도 바울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형식을 초월한 것을 섣불리 흉내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바울은 형식을 초월한 것이지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한 초월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모른 채 섣불리 형식을 초월하자고 나선다면 그것은 자기의 편함을 위해서 형식을 무시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서, 복음에 참예하기 위해서 행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목표와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행동은 오직 하나님이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신앙의 수준을 행동의 여부로 정하려고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정해 놓은 신앙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그 기준에 얼마나 도달하느냐의 여부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 못한다로 결정지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자의 신앙 여부는 내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지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잊는다면 그 순간부터 신앙생활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면 그 삶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겠습니까?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자기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보다는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떤 준비도 필요치 않습니다. 즉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헌신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기를 어려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권리도 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주님께 놓여 있습니다. 주님이 책임지실 문제이고 우린 단지 주님이 하신 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할 종의 입장이지 우리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앞세우며 주님께 무엇을 요구할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종은 종의 자리에서 주인을 섬길 뿐입니다. 종에게는 종의 할 일이 있고 종의 자세가 있습니다. 만약 주인이 할 일과 종이 할 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주인이 있어야 할 자리를 종이 차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망가지고 신자의 신앙생활이 엉망이 되어 가는 것은 모두다 종이 종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주인의 자리에서 스스로 종이라고만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의 자세가 없고, 종의 모습이 없는 이름만의 종이 바로 지금 현대교회의 벗어날 수 없는 실상입니다.
종에게는 내일 일을 걱정하고 염려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의 명령대로만 움직일 뿐입니다. 교회 부흥을 걱정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것은 종의 일이 아닙니다. 먹고 살 일을 걱정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것 역시 종의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기에 오직 종의 자리에서 절제할 것을 절제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초월할 것을 초월하며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행동했던 것입니다.
23절에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는 것은 복음 속에서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인도하는 대로 복음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자기의 자유가 없습니다. 복음에 매인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의 짐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천국이란 좋은 곳이어서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곳이 곧 천국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이 천국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환경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생활 형편이 좋아지고 항상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환경이 좋지 않고 형편이 어려워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낙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이것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이며 천국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렸던 자유가 여러분 자신의 자유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복음을 위해서 절제하고 양보하며 사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 살아갈 때 가능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절제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살았던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삶을 바울은 달음질하는 경주자와 권투를 하는 선수로 비유합니다. 바울은 이 경기를 예로 들면서 자신의 삶을 말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24절에서 '다 달아날지라도'라는 말은 도망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달음질하는 자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목표도 없이 무작정 달리지 않습니다. 또 권투를 하는 사람도 쳐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26절의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라는 말도 권투선수가 허공을 치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경주자나 권투를 하는 사람은 이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승리에 방해가 될만한 것은 스스로 거부하고 절제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를 못합니다. 우승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해서 절제없이 마음대로 먹어버리면 우승은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눈앞의 것 때문에 목적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로 들면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도 그토록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면서 우승을 위해서 행동하는데 하물며 영원히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목적으로 사는 신자들이 절제없이 자기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알고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은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한 자유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주장하고 누리는 자유가 하나님의 일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 방향도 없이 달리는 경주자 같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했다는 것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구원을 염려해서 절제하는 사람을 산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절제는 자기를 위한 절제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바울은 신앙이 좋으니까 별 갈등도 없이 신앙생활을 쉽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도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고 살피지 않으면 한순간 복음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의 두려움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을 지옥 가는데 대한 두려움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과 상관 없는자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신자들에게서는 바울의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이 없이 너무 담대하게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꾸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힘없는 자가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신자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목표없이 달려가는 경주자의 모습이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교회로 나오십니까? 이시간 그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이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것이 목표라면 여러분의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서 오직 복음을 위해서 절제하고 양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쉽지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날마다 나를 쳐서 말씀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욕심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오직 복음을 따라 움직이도록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절제는 생명을 향한 목표가 있을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가를 바로 알기 때문에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로 인해서 신앙의 갈등을 겪고 살아간다면 아직까지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안다고 하더라도 종의 자리가 아닌 주인의 자리에서 종으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