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 가운데 구원에 대한 확신의 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니까 도저히 자신은 구원받은 신자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목사를 찾아와서 '목사님, 저도 구원받았을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그 질문의 의도를 보면 자신을 점검하겠다는 것보다는 종교지도자요 하나님의 사자로 여기고 있는 목사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의심과 불안을 해소시켜 보겠다는 좋지 못한 의도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싶습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든지 아니면 꿈이라도 꿔가지고 '너는 구원받았다'는 음성을 듣고 싶습니까? 실제 여기에 몰두함으로 그런 환상에 빠지거나 환청을 들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싶어하느냐는 것입니다. 의도가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방종의 조건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구원받은 자는 멸망 받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구원의 확신 속에서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언제 구원받았는지 날짜를 안들 그것이 신앙생활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오히려 그 확신으로 인해서 망설임 없이 방종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구원의 확신으로 생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구원받고 안받고는 중요한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나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도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관심은 삶의 목표를 세상에 두지 않고 하늘에 두는 차원의 관심이어야지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차원의 관심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를 위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 중요하지 자신에게 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을 여러분의 편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오랫동안 들어온 것이 하나님은 우리편이라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면 그것은 전혀 백해무익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관심둘 것은 하나님이지 결코 내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를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할 관심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보다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어떤 혜택을 누려볼까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은 신앙의 시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은 이제부터 내편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편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 때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느 한쪽을 들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옛날 이사람들은 이렇게 하다가 멸망당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멸망당하지 않도록 그러한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본문이 기록된 이유입니다.
5절에 보면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멸망을 받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말합니다. 즉 신령한 것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멸망을 받았다는 것은 많은 신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신령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기를 씁니다. 신령하다는 기도원에서 신령하다는 목사를 통해서 신령한 체험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체험을 일평생 우려먹으며 체험을 의지하고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체험을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체험이라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건너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죽음 속에서 살아난 실제 체험입니다. 쓴물이 달아지는 체험을 했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체험을 했고, 하늘에서 내리는 신령한 음식인 만나도 먹었습니다. 누가 이들의 체험을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도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신령한 체험이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신령한 체험은 새로운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오늘날 신자들이 체험에 매달리고, 체험을 의지하고, 체험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령한 것을 체험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신령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악을 즐겨했던 것입니다. 7절에 우상숭배를 했고, 8절에 간음을 했고, 9절에 주를 시험했고, 10절에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기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에 보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들을 앞세워서 신앙의 우월감을 내세우고 우상의 지식이 없는 자들은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육신의 모든 문제는 초월했다고 여기고 음행도 마음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린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옛날에도 신령한 체험을 하고서도 멸망을 당한 자들이 있었다고 경고합니다.
지금 바울은 천국에 간다 못간다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책임은 그리스도를 알았으면 그리스도를 안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로서의 책임입니다. 신령한 것을 체험했으면 신령한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령한 것을 체험한 자의 책임입니다.
신자의 신앙의 싸움은 누가 체험을 많이 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신령한 것을 체험한 사람답게,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신자답게 사느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들여다보면 신자들이 모두 엉뚱한 싸움에 매달려 있습니다. 남보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고, 내 교회 부흥되고, 내 구역 1등하고, 봉사많이 하고, 심지어는 구제하고 선교사 보내는 일에까지 경쟁적으로 싸움하듯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를 확인하는 싸움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싸움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속히 버리셔야 합니다. 신앙의 정신은 우리의 욕망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절제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6절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신자된 자들이 악을 즐겨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신자들이 자신을 점검할 때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이 자신에게 악을 즐겨하는 모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가 악을 즐겨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안에 이스라엘의 악을 즐기는 모습이 있는지를 꼭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있다면 아직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지 않으면 세상에 자신을 양보해 버리고 삶의 편안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한 체험을 한 자는 신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령한 삶이란 무슨 거창하고 특별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악의 모습이 버리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주를 시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삶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신령한 삶이 앞으로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압니다. 이 말씀 앞에서는 왠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13절에서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또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것은 시험을 겪지 않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할 길이란 능히 감당하게 하는 것이지 시험을 피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실패는 영원한 생명보다 자신의 몸을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할 길이란 자신의 몸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서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 피할 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령한 삶에 힘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