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신령한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목적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애굽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새로운 삶을 소망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의 삶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우상숭배, 간음, 주를 시험,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신령하지 못한 삶이며 가나안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령한 삶은 여호와를 거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사 나에게 죽음이 온다고 해도 여호와는 거역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안하고에 상관없이 신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시 우상 숭배의 문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 8장에서 우상 숭배의 문제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제물을 먹느냐 안먹느냐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말합니다.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덕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8장 이후부터 계속 등장하는 것이 절제와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형식을 초월하는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자기가 아니라 형제였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부처에게 절 안하고 점쟁이 찾아가서 점치는 일을 안하니까 나는 우상숭배 안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상 숭배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자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신자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 분명히 있게 됩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뭔가 내 마음을 잡아끄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채워주시지 않는 이상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령한 삶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 애굽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으로 감사하면 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상을 섬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따로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를 피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이 만족되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삶이며 천국에 합당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조그만 어려움에서 쉽게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은 주님께 나를 바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전부를 드릴 마음이 없이 겨우 주일 한시간의 예배와 십일조로 모든 것을 때우면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쉽게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20절에 바울은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이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이방인이 제사할 때 무엇을 바라고 합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다른 무엇을 구하도록 유혹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 나오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나온다면 그것이 곧 귀신과 교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귀신과 교제한다는 것은 귀신을 만나고 악수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 자체가 사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고방식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사단과 교제하는 것이고 귀신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고방식은 자기가 소망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돈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 결혼하는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상숭배이고 귀신과 교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귐을 말합니다. 15,16절에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신자를 세상에 고정시키고자 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떠나도록 합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이 전부인 것을 가르치시고자 합니다. 이것이 천국에 합당한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에게 광야가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광야를 싫어합니다. 무조건 편안하고 행복한 것만 기대하고 욕심을 냅니다. 그것이 귀신에게 절하고 귀신과 사귀고 있는 것임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여기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지를 못하고 살아갑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들으면서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불평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과 교제하는 삶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 심각성 때문에 말씀은 중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하지 않는 교제, 사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고 몸에 참예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주님과 같이 내 살과 피를 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전부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놓았듯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내어 놓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안에는 인간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공, 출세, 세상 행복 이런 것들은 마귀가 제시하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오직 영원한 생명, 이것 하나만 존재합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자는 생명만을 바라고 주님을 찾는 자입니다.
이것이 힘들다는 것을 잘압니다. 인정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세상에 머물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수많은 시험이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사 시험을 감당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이기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승리를 위해서 우리를 광야로 몰아 내는 것입니다.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시험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머물러 살아가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리시고 살을 찢기시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복된 것을 가지고 다가오는 가짜 그리스도만 보여지게 됩니다.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 합니다. 두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귀신과 교제하면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제를 원하십니까? 주님과의 교제를 원하시면 세상 아닌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께 '나와 사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다른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사귐의 초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과의 사귐에 머물기를 소원하며 힘쓰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입니다. 신자의 소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이 외에 다른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귀신과의 교제에 머물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