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소위 화끈한 것을 좋아합니다. 뭔가를 하면 했다는 기분이 들어야 할 정도로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밋밋하고 별 느낌 없고 조용한 것은 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이런 것이 지금 교회 분위기입니다. 왜 하느냐는 것보다는 했다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빠져있는 교회는 자연히 열심을 강조하게 됩니다. 열심도 화끈할 정도로 해야 열심히 인정합니다. 자신이 뭔가를 했다는 느낌을 가져야 만족해합니다. 기도를 해도 속으로 조용히 하는 것은 열심 없는 기도라고 오해합니다. 기도산에라도 가서 손을 들고 목이 터져라고 '주여'하고 외치다가 목이라고 쉬어서 내려와야 기도했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조용히 부르는 것보다는 손뼉을 치면서 박자를 빠르게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쉴새없이 교회의 여러 가지 일에 참석하면서 자신이 믿음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교회의 표도 아니고 신자의 표도 아닙니다. 단지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또 화끈한 분위기보다는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결국 성경보다는 자기 취향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이것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기쁨과 자기 만족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은 모두 물거품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했다는 것, 헌금했다는 것, 예배드렸다는 것 그 자체를 가지고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린 그것을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고린도 교회는 소위 신자들의 모임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모인다는 것이 본문에서 무척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책망을 듣고 있는 것을 보면 교회가 단지 모이기에 부지런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교회의 표가 결코 부지런히 모이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이는데 열심을 내라는 강조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모임의 진실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모임은 결국 다른 잘못을 불러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임에 부지런했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성찬을 겸했습니다. 또 그때의 성찬은 지금과 달리 식사를 겸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떤 예식이라는 틀 속에서 하는 성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찬을 사도 바울이 책망을 합니다. 22절에 보면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합니다. 성찬으로 인해서 교회가 업신여김을 받고, 빈궁한 자들이 부끄러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찬식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었고 그 음식은 부자들이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이 가난한 자는 생각지 않고 자기들끼리 먼저 음식을 나누어 먹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찬의 의미를 무시한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세워진 교회를 업신여긴 것이며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성찬의 의미를 말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26절에 보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즉 성찬은 한두번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찬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계속되어진 성찬으로 인해서 습관화되어진 것 같습니다. 안일하게 성찬을 하면서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한 의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가르침으로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서는 모임도 바른 모임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모였다는 것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있습니다. 몸과 피가 무시되어진 교회는 분명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실 때 항상 조심스러움을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한주일에 몇번씩 모이는 모임이 계속되어지다 보니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습관화되어서 안일함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들이 바로 그 습관과 안일함에 빠진 채 이 자리에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피와 몸이 바로 여러분들로 인해서 무시되고 있는 것이고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신자라고 하는 여러분들로 인해서 무시당하고 있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란 주님의 죽으심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세상을 바라보듯이 주님 편에 서서 세상을 불쌍히 바라보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라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주님의 죽으심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주님의 죽으심을 잊은 채 모이고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때문에 교회로 모여진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몸과 피에 의해서 모여진 한몸이라는 것으로 무시했습니다. 그것이 편당을 초래하게 한 것입니다.
교회에 편당이 발생하건 문제가 발생하건 그 모든 이유는 주님의 죽으심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단지 모이기 위해서 모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여러 가지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보다는 세상적인 모습들이 교회를 채우기 때문에 분쟁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모이는 것 하나까지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의미가 사라져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서 분주하게 살다가 그 마음 그대로 교회라고 찾아 나오기 때문에 교회로 모였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한몸된 관계를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은석교회에 다니는 같은 교인이라는 세상적인 인간관계로만 생각하고 말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미워하고 쉽게 싫어하고 쉽게 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28,29절을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자기를 살피라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살아가는지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죽으심을 외면한 채 성찬을 단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만 여기면 그것이 곧 주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자기는 그대로 살아있는 채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무엇을 해도 주님의 죽으심을 잊은 채 하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는 것은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열심이 아닙니다. 뭔가 하도록 부추기는 분위기도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신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나도 함께 죽어 있는 신자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이 자리에 나오도록 한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옛날부터 해오던 습관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주심의 죽으심을 기억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지금 의식적인 성찬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모일 때, 주님이 흘리신 피와 찢기신 몸의 의미를 알고 이 자리에 모일 때 그것이 곧 성찬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잊지 않고 사시기 바랍니다. 직장에 다니실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사업을 할 때도,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 부를 때도 주님의 죽으심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잊는 것은 주를 무시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