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21 한몸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서 살아가는 신자되었다면 그것은 성령이 나에게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나는 주를 고백한다는 것을 통해서 '나는 성령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보여주기를 좋아했던 삶에서 자기는 감춰지고 주님을 보여주기를 힘쓰는 삶을 사는 사람이 곧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주님을 주로 영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주인 되어서 나를 위해서 살던 삶에 개입하셔서 이젠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세상에 보여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 성령입니다. 때문에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은 자기를 나타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되신 분만을 나타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은 사라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은 그 어떤 선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성령으로 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4-11절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 자체에 의미를 두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은사를 가지고 서로 경쟁까지 하면서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무시하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은사 받은 것을 자랑으로 내세웠습니다. 은사가 곧 능력의 표시였고 신앙있음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자동적으로 은사는 교회에 분쟁과 분파를 가져왔고, 우월감을 내세우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도 은사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지금 은석교회는 은사에는 전혀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병을 고치는 은사를 행한다면 아마도 모든 관심은 그쪽으로 쏠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보다는 누구누구가 병을 고친다더라가 더 관심거리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자들이 은사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원인은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은사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나는 은사를 받았다'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은사를 자신의 신앙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표로 사용해 버리고 결국 자신의 신앙체험을 자랑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은사를 말하면서도 은사는 비록 여러 가지지만 모든 은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지혜의 말씀도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도 성령으로, 믿음도 성령으로, 예언도 성령으로, 병고치는 것, 능력 행하는 것, 방언 하는 것, 영 분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각 사람이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았지만 다 한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결국 한 성령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각기 받은 은사를 통해서 주님을 보여주라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신자가 떨쳐버리기 힘든 유혹 중에 하나가 자신이 달라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은사를 원하고 성령을 받고 싶어하는 것도 남들 보기에 달라진 신자가 되고 싶어서 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도 달라진 사람으로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달라지고 싶어서 많은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연초가 되면 새로운 결심을 이것저것 많이 합니다. 올해는 좀 달라져서 작년보다 나은 신자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달라지려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낙심하고 맙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싶어서 은사를 받고 성령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분은 주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받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시라 고백한다면 나 자신의 힘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나에게 은사를 주셨고, 나같은 자를 살리셨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를 살려주시고 죽음에서 구출해주신 분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지 죽음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바라보며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체험이나 자랑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요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발라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소경에게 '어떻게 해서 눈이 떠졌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말을 했겠습니까? 기적의 체험을 한 사람으로서 의기양양하게 내가 뭘 어떻게 어떻게 했더니 주님이 고쳐주시더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즉 내가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 행동에 대해서 응답하신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경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합니다. 소경은 주님이 하신 일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단지 주님이 하라고 해서 한 행동이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나를 살려주신 주님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일에다가 우리의 공로를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의 의로움을 부각시켜야 만족해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야 흐뭇해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몸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지적합니다.

12-31절까지 보면 바울은 한 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12절을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또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보면 여럿과 하나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여럿은 아무리 많아도 결국 하나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란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조심해야 할 죄는 이기주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을 우리가 대신해야 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체에 불과한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교회에서 나를 보여주고 나를 드러내는데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몸되신 그리스도를 도외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는 각각 다른 은사가 있고 다른 직분들이 있지만 그것을 서로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비교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은사를 받았다면 그 은사가 자신에게 주는 유익은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은사로 어떻게 몸을 유익하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라는 것입니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각각의 지체들이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몸된 관계로 모였다면 우리도 각기 개인의 유익보다는 몸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한 성령 안에 있는 몸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신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몸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비록 많은 지체이지만 모든 지체가 성령 안에서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한 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몸된 관계에서 나타나는 죄는 이기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자신의 위치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별볼일 없는 위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상상외로 많은 분들은 교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별볼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은 직분을 맡아서 이분야 저분야에서 수고하고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교회에서 하는 일에는 소홀하고 관심이 없게 됩니다. 내가 없어도 얼마든지 할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교회에 대해서 소홀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앞에서 나와서 하는 사람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도 교회입니다. 17절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몸에는 어느 한 부분을 가지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교회에도 어떤 은사나 위치를 가지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21절에 보면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를 따지면서 누군가를 향해서 '너는 쓸데없는 존재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의 관계를 모르는 신자는 '하나님 나는 왜 이런 일만 해야 합니까?'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나같이 부족한 자도 예수님이 쓰시고자 부르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주님이 쓰시는 신자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능력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쓸모 없는 신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쓸모 있고 없는 것에 대한 구분입니다. 우리를 어떻게 쓰시느냐는 것은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의견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린 단지 순종하며 살뿐입니다. 신자가 항상 소원해야 하는 것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나 때문에 이웃과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있는 신자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에 관심을 두지 말고 주님만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