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각자 자기에게 힘이 될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을 추종하는 가운데 발생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책망하기 위해서 등장시키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신앙은 십자가의 정신과는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 스스로는 예수를 가장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자랑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십자가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벗어나 있는지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얼마나 교회 일에 열심이냐를 점검할 것이 아니라 과연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을 가지고 서로 분파를 조장하고 자기가 받은 세례를 가지고 서로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례란 누구에게 받았느냐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외적인 것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을 즐겨하고, 자기보다 못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시하면서 자기가 더 우위에 있음을 스스로 즐겨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느 신학교 출신이냐가 조건으로 등장하고,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느냐가 조건으로 등장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일하고 저런 일한다는 것이 자랑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십자가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무엇을 하든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고 우월감을 가지게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왜 해야 하는지 그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신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줘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도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십자가의 정신을 깨닫게 하는 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교회의 일을 하나의 업적을 쌓아가는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고, 환경운동을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신과 자신의 교회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교회보다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교회에 대해서 불만이 일어나는 이유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데 교회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내세울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불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들이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우리 교회도 저런 일을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도 결국은 그 일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만족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사람은 선한 일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함으로서 자신은 남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남들보다 못살아도, 교회가 적어도, '나는 너희들보다 선한 일을 많이 한다, 우리 교회는 비록 작아도 선한 일에는 열심이다'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산다는 것에 대해서, 작은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을 벗어나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바로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드러난 일부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은 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힘이 있어야 큰소리 칠 수 있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도 기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모여서 교인 수를 말하고, 선교를 얼마 했고, 구제를 얼마나 했다는 것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목회를 잘하고 있다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표를 내세워서 다른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실패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십자가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십자가라는 것이 그렇게 미련하게 보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미련한 것입니까? 힘을 포기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힘이 되는 것을 얻고자 발버둥치면서 살아가고, 힘이 자기에게서 사라지면 그토록 낙심하고 비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 등장한 십자가는 오히려 있는 힘까지 포기하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지고 망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오해했습니다. 십자가도 자기의 힘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등을 만들어 가지고 서로 우월감을 내세웁니다. 나는 방언을 한다, 나는 병을 고치는 은사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자랑합니다. 십일조를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더라, 주일성수를 했더니 이러한 은혜를 주시더라하면서 십자가를 서로 차별화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가는데는 어떤 과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지나가다가 한번 다녀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소위 특별한 체험을 하고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죽을병에 들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있고, 꿈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체험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데는 특별한 체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체험들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과정이고 도구이지 신앙 그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지금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특별한 체험을 신앙의 전부로 오해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그런 체험을 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체험을 내세우면서 십자가를 차별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런 체험도 없이 나온 너하고, 특별한 체험을 하고 나온 나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차별화하는 것입니다. 같은 서울에 살아도 7학군이니 8학군이니하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어떤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또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체험이란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하고 특별한 종교적인 체험은 불교에도 수없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체험은 체험 그자체에 의미를 둬버립니다. 체험을 자기들의 신앙과 연결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체험 그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 있다면 그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알았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체험이 있든 없든 우리 모두가 만나는 곳은 그리스도안입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안에서 만나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되었는가를 자랑하고 있겠습니까? 자랑할 것은 내가 깨닫게 된 주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다. 죽은 죄인인 우리를 살려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은혜는 모든 신자가 각각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합니다. 이 은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체험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우게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며 십자가를 차별화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의 반대편에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랑이 될만한 모든 것을 꺽어버립니다. 도저히 자랑을 할 수 없도록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립니다. 단지 자랑하지 말라는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랑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랑은 내가 자랑이 될만한 일을 하거나 어떤 조건을 갖췄을 때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일단 나를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죄인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랑은 '내가 선한 일을 했다'는 인식하에 나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랑을 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고 자랑이 나오는 입이 다물어 지는 것은 진심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부름 받은 우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가 미련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의 능력으로 다가오고, 나의 힘이고, 십자가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오늘도 교회에 나와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기쁨때문에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까? 뭐가 즐거워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까? 요즘은 보일러에 기름을 한 드럼만 넣어도 퐁퐁을 주고 수세미를 주는데 교회에 나와줬다고 주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오히려 내돈 쏟아 붓고, 내 노력 쏟아 부으면서 나오는 것이 교회아닙니까? 무엇때문입니까? 오직 하나! 생명때문이 아닙니까? 죽어도 다시 사는 힘, 그 힘 때문에 교회로 모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미련하다고 욕을 해도 이상하게 우리들에게는 절대로 미련한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모든 것을 갖다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귀하고 가치있는 십자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지혜로 되는 일입니까? 사람이 아무리 언변이 좋아도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권력을 가지고 강제적으로 믿으라고 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전의 사고방식으로는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같이 미련한 것이라고 비웃고, 멀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인데 이상하게 우리들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 십자가만이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힘이라고 고백하면서 나도 같이 십자가에 달리는 믿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1절과 2절에서 부르심을 입은 사도와 부르심을 입은 성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도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합니다. 또 26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바울은 세상사람들은 다 무시하고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십자가를 우리는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내 생명으로 여기며 십자가에 나를 맡긴다는 말을 하고 십자가의 정신인 지고 망하는 길로 가게 해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부르셨기 때문에 되어지는 놀라운 기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왜 이 사랑이 있는데도 여기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모두에게는 동일한 사랑입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그 사랑으로 부르시는 과정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정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정에 매달려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은 귀한 줄을 모른채 십자가만을 말하기 때문에 용서와 사랑이 아니라 우월과 자랑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는 자기의 실력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면서도 내가 기도를 많이해서 은혜가 주어졌다거나, 주일을 잘지켜서 은혜가 주어졌다거나, 십일조를 철저하게 잘해서 은혜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조건을 내세우는 죄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헌금하고자 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셨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문제점은 너나 할 것없이 자기 잘났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올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고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외치고, 오직 주님의 공로로 천국으로 인도함 받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같이 모여서 교회생활할 때는 그 은혜와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빈정거리고 싸우는데만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사랑안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내 실력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능력이나 지혜로 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도 예수를 모르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십자가를 욕하고 있을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셔서 십자가를 아는 자가 되었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같은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자리까지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감사와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늘 불만과 다툼과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까? 자신의 있는 신앙의 자리를 점검하시면서 십자가 안에서 주님과 연합한 자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