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9 예언과 방언

지난 시간에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자신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찾으십니다.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알려면 하나님보다 더 우선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자기보다도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으로 산다면 그 신자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지 자기를 나타내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 안에서 나를 주관함으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달라지게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란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한 후에 14장에서 방언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1절에 보면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합니다. 사랑의 문제가 예언으로 등장합니다.

신자가 살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선물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끌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즉 사랑만 있으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알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것을 이해하는 자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안다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신령한 것을 원하는 수준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는 신령한 수준으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처음에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을 때는 세상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도 세상적인 것이 중간에 주어졌을 때 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수준에서 이제는 세상적인 것과 상관없이, 기적적인 것, 외적으로 신령하게 보인 것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언과 방언을 비교합니다. 본문은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방언을 하려면 통역을 하라고 합니다. 5절에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합니까? 4절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씀대로 방언은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예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방언이 자기의 유익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방언은 통역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고,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이란 앞날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의 운명이나 세상에 되어질 일을 인간의 계산과 추측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되어질 일을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예언이란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 속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며 하나님이 세상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바른 예언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예언은 그 어떤 신령한 은사보다도 교회와 신자에게 미치는 덕이 큰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불러냄을 받은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지탱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복이 유지되는 모임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 때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보다 더 큰 은혜와 힘이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예언이고 때문에 예언이 교회에 덕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합니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단지 자기의 덕을 세울 뿐이지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하등의 유익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을 목표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방언을 은사로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덕으로 그치는 문제라면 방언은 왜 은사로 주어졌습니까? 방언도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주어진 은사라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옳은데 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주시고 그것을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통역의 은사를 따로 주시는 것입니까? 뭔가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특성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에서는 방언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단지 방언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의 방언의 의미와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이해하는 방언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먼저 초대교회때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즉 성경이 완성되지 아니한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계시가 완성되어 있는 때입니다. 이것을 구분하고 방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필수적으로 심판을 전제로 합니다. 즉 심판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지 심판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우선적으로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한해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결국 세상이 심판 받을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심판 받을 존재다'라는 것이 방언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어 있지 않은 초대교회때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방언도 결국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기 위한 은사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계시, 즉 말씀이 완성되어 있는 지금에는 세상을 심판하는 역할을 무엇이 합니까? 말씀 자체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선포될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곧 세상이 죄악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초대교회때 방언을 했을 때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한 말을 한다는 놀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놀림은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말하는 사람들이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 자들이 사랑에 다스림 받으면서 예언을 말할 때 그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 됩니다. 그 말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결국 우스개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하는 것은, 통역이 있어야 그 방언이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생각하지 말고 교회의 덕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통역 있는 방언은 곧 예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 없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19절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도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이 뭐냐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완성된 계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여기에 더 이상 다른 것을 첨가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장성한 신자들의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