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습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만 행동을 하지 전혀 이익이 되는 것이 없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피하려고만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강도만난 사람의 경우에도 제사장과 레위인이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버린 것은 그 일에 상관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갈수록 이기적이 되어 간다고 합니다.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지혜는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 안하고 손해될 일에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비록 이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소위 교회만큼은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교회에서도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질 이익을 계산하면서 주님을 부르고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필경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기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15장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부터 은사의 문제를 계속 다루어 오다가 갑자기 부활의 문제를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은사의 문제를 무엇으로 풀어가고 있는가를 기억하십니까? 바울은 은사의 문제를 사랑으로 해결해 갑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단지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은사는 사랑으로 사용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에서 나옵니다. 주님이 수난과 죽으심을 외면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을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이 가신 수난과 희생의 길을 기뻐하며 가고자 할 때 거기에서 형제들에게 사랑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길에 서서 비록 내가 고생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기뻐하면서 하라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갑자기 부활을 말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며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우리의 현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단지 사도 바울이 전한 말, 즉 복음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3,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한 구원을 얻는 길이란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렵습니까?
교회를 다니는 신자치고 이것을 믿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너무나 쉬운 문제인데 바울이 볼 때는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고 지킨다는 것은 말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몸소 고통에 자신을 던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 또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결국 자기 한몸 지키고 보호하고 편안해지기 위해서 형제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일을 거부하고 피해버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믿는 것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믿음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생각해 버립니다. 즉 자기를 위한 믿음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의 잘못된 점입니다. 자기를 위한 믿음으로 여기기 때문에 모든 관심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혜택, 이익에만 두고 살아가면서 믿음 덕분에 세상을 좀더 편하게 살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계산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 지신 주님을 믿는다면 적어도 이러한 세상사람들의 방식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방식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평소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베풀면서 뭔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는 예수님을 쫓다가도 이익이 없으면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는 편에 섭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서 주님에게서 멀찍이 도망쳐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익을 바라고 주님께 나오십니까? 나는 세상의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다면 부활과 천국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장사 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 곧바로 하늘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와 사도와 오백여 형제들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셨을까요? 단지 내가 살아났으니까 너희도 살아날 것을 믿으라고 권면하기 위해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후로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셔야 타당합니다. 부활의 모습을 보여 줘야 믿을 수 있다면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그 모습을 보여주셔야 믿을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부활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도망을 쳤거나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 또는 바울같이 예수 믿는자를 핍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너희가 지금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묻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하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을 보증하시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활은 내가 죽고 다시 산다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내가 산다는 것 때문에 부활을 좋아합니다. 주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찾는 모습입니다. 믿음은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좋아서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부활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은사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주님이 여전히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꼭 눈으로 봐야 알겠습니까? 10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핍박했던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주님이 살아계신 증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증거는 자기의 죄를 인정할 줄 모르고 자기만 알던 우리들이 죄를 고백하며 우리의 더러움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할 줄 아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만큼 더 큰 증거는 없습니다. 이 증거와 함께 주님만 사랑하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