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28 그리스도안에서

교회는 특이한 사람들이 모이는 특이한 단체입니다. 세상의 여느 단체와 똑같이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단체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일단 세상 단체는 그 단체를 다스리고 이끌어 가는 사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체의 발전과 질서를 위해서 회칙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회칙을 기준으로 단체를 다스려갑니다. 그리고 업무를 분담해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그것이 단체의 성장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이라고 해서 교회의 모든 것을 총괄하도록 하고 있지만 사실 교회의 당회장은 예수님입니다. 목회도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이야 당회장이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이 어떤 은석교회의 당회장으로서 모든 일을 다스릴 수 있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어쨌든 교회 일은 목사가 하고 있는데 당회장을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높이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옛날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있었던 '섭정'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아실 것입니다. 등극한 왕이 나이가 어릴 때 그 모친이 왕의 뒤에서 발을 치고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왕은 단지 앞에 있을 뿐이고 왕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왕의 모친이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바로 그와 같습니다. 목사가 왕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똑같은 성도인데 단지 가르치는 자로 앞에 내세워져 있을 뿐이고 모든 일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즉 목사의 뒤에 계시는 보이지 않는 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의심을 가질 것입니다. 목사가 제멋대로 말해놓고 예수님의 뜻이라고 한다 해도 그것이 진짜 주님의 뜻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뭐냐는 의심도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신자들이 살아가면서 매우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문제입니다. 구약시대같이 선지자에게 꿈이나 음성으로 계시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말씀이 교회로 모인 우리의 회칙이고 우리를 다스리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목사는 그 말씀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특이한 단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말씀이 옳다 하면 옳은 것이고 아니라 하면 아닌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시인 말씀보다는 우리의 경험과 상식을 앞세워서 삶의 방향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이야기입니다. 부활이란 신자는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부활한다는 것이 기쁩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부활이 진심으로 기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 덕분에 세상을 좀더 편하게 사는 것이지 부활에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부활은 그냥 막연한 이야기고 그저 이 세상에서나 돈 걱정 안하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극히 현실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입니다.

부활이란 죄 때문에 지옥가야 할 내가 주님의 피 때문에 살았고 주님께서 새로운 세계, 즉 부활이 세계를 만드시고 나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아는 신자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을 기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17절) 부활은 우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를 죄가운데서 생명으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입니까? 내가 경험했고 상식에 맞는 일이기 때문에 믿습니까? 확인하지도 못하고, 경험해 보지도 않은 일이고 상식에 맞지도 않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 이유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주님의 뜻이 모두 담겨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 대해서도 소경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슨 장사를 해라'라는 식으로 주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지 우리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모독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의 편한 삶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해준다는 약속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린 내 한몸 편하기를 원하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뜻에는 삶의 편안함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힘든 인생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겨우 인정한다고 해도 좀 더 좋은 삶을 주시기 위해서 우선 연단 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것입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힘들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이란 하늘의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하늘의 것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산다면 주님의 뜻은 도저히 알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에 바른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세상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에 하나님의 생각을 담아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우린 그 가르침에 복종해야 할뿐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단지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배우는 시간이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언제나 둘로 나누어서 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우리도 하나님의 입장과 마음으로 세상을 봐야 합니다. 22절을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은 말씀 앞에서 아담 안과 그리스도안으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한쪽은 죽음이고 한쪽은 삶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목적을 하늘에 두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약 삶의 목적과 의미를 세상에 두고 있다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6절)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기보다는 고생 없고 편안한 삶을 더 마음에 두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것으로 끝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으로 끝난다면 믿음의 보상은 세상에서 주어져야 합니다. 또한 분명히 세상에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보상은 세상을 떠나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으면서 목적을 부활을 세계에 두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고 내가 잘되는 것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아담 안에서 자기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중의 하나로 끝납니다. 비록 고난과 어려움과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그리스도안이라면 삶이고 축복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그 기준이 하나님의 계시이지 내가 아닙니다. 나에게 좋으면 복이고 좋지 않으면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편이 아니라 내 편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생하면서 세상을 살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 것이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풀이 죽어서 낙심하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가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23절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는 말씀대로 주님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안에 있던 신자는 부활의 세계라는 영원한 삶을 얻게 됩니다. 약속이고 주님의 뜻입니다. 이 약속 앞에서는 세상의 어떤 기쁨도 신자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신자로서 세상의 염려와 걱정 때문에 이 기쁨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지 마시고 약속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사는 삶이 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계시를 아는 신자로서 옳은 삶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며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