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49 부활의 몸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35절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는 말씀을 보면 바울은 두 질문을 통해서 부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한가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때마다 난감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 많은 신자들이 부활에 대해서 흥미를 잃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부활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있는데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니 힘들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서 흥미를 잃은 이유는 분명한 합니다. 부활의 사건을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급한 일은 따로 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시급한 생각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고 난 뒤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일도 바쁘고 신경 쓸 것이 많은데 언제 죽은 다음의 일까지 신경 쓰면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믿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로 그친다면 괜찮은데, 놀라운 것은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조차도 부활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인생이란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도 부활로서 마쳐지게 됩니다. 완성체로 다시 살아나면 하나님의 모든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부활에 대해서 흥미를 잃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마치 어떤 사람이 서울을 구경하고 싶어서 기차를 탔는데 서울에 대한 흥미는 다 잃어버리고 단지 차창가로 지나가는 경치로 만족해 버린다면 무엇 때문에 기차를 타고 있는 것입니까? 혹시 우리가 지금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단지 죽은 사람이 예수님이 오시면 다시 산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지만 부활은 겨우 그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부활에는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다 내걸어도 좋을 만큼 귀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것을 발견하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어느 사람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는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사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다시 산다면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는 것입니다. 즉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이 너무 허무맹랑한 말로 들려져서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또 다시 산다 할 것 같으면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입니다. 오늘 이 문제는 절대로 죽은 후의 문제이거나 먼 훗날과 연관된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의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부활하든 말든 또는 어떤 몸으로 부활하든 그것은 현재 나하고는 상관없는 문제다라고 생각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신자는 부활에 대한 문제를 정확히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로서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질문에 대한 설명을 농사꾼들이 씨앗을 뿌리는 것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먼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사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36절에서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합니다. 즉 씨가 뿌려져서 땅에서 썩어지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 위함이다는 것입니다. 씨앗이 완성된 몸이 아니고 숨겨진 완성된 몸이 있는데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분명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몸을 하나의 씨앗으로 보고 있습니다. 씨앗으로 본다면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부활한다는 것을 의심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몸을 씨앗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성품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 나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부활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현재 몸, 즉 씨앗에 불과한 몸을 완성체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뿌려져서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을 무시한 채 단지 씨앗에 불과한 몸을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부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몸은 씨앗에 불과한 것입니다. 땅에 뿌려져서 죽지 않으면 절대로 다시 살 수 없는 씨앗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씨앗에 불과한 몸을 고이고이 간직하려고 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씨앗 에 불과한 형체를 아름답게 가꾸고 보존하려고만 합니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사는 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죽을 몸이고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아담의 형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죄는 흙에 불과한 형체에 관심을 둘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어야 다시 산다는 말씀이 여러분의 현재의 신앙생활과 어떻게 직결됩니까? 죽지 않으면 다시 사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몸에 가치를 두지 마십시오. 몸에 가치를 두고 산다면 죽지 않으려고 애쓰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부활보다는 자신의 몸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몸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몸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남보다 예쁘다고 해서 자랑할 필요 없고 못났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못나도 잘나도 결국은 똑같이 흙으로 돌아갈 몸이고, 결국 잘나봐야 젊었을 때 잠깐동안 아닙니까? 그런데 그 몸을 자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사십시오. 그것이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다시 산다면 어떤 몸으로 오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가 장차 부활한다면 그 모습은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은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죽을 당시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한다면 절름발이는 절름발이 그대로, 상처가 있는 사람은 상처가 있는 그대로 부활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손에 못자국이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이 다시 부활할 때는 있는 흉터 그대로 가지고 부활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모른 채 자신의 머리를 굴려서 장래 일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은 흉터가 있는 그대로 부활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주님을 쫓아 부활의 삶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이 없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흉터를 가지고 부활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압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장차 부활할 때는 흠없는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절름발이든 소경이든 흉터가 있든 없든 모두가 깨끗한 몸이 되어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생긴 사람은 못생긴 그대로 부활합니까? 아니면 예쁜 얼굴로 바뀌어서 부활합니까? 못생긴 그대로라면 또 불만일 것이고, 예쁜 얼굴로 부활한다면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모습이 다 같아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 갓난아이를 죽은 자가 부활한다면 그 자는 어른으로 변해서 부활하는 것인가? 아니면 갓난아이 그대로 부활하는가? 등등 여러 가지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혼동 모두가 몸을 씨앗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을 사라지고 썩어질 아무것도 아닌 흙으로만 본다면 지금의 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새롭게 변해서 부활할 몸에만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몸은 썩어지고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왜 자꾸 몸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까?

37,38절을 보면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말합니다. 뿌리는 것이 장래 형체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우리의 몸은 장래의 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꽃을 예로 들겠습니다. 밭에다가 채송화 씨를 뿌렸다고 합시다. 장차 피어날 채송화는 씨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씨는 볼품이 없지만 꽃은 아주 예쁜 모습으로 피어납니다. 씨가 묻혀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씨가 채송화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죽어야 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형상에 불과한 우리의 몸이 씨에 불과하다면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은 장차 부활한 영광스런 우리의 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스런 몸은 지금의 씨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씨와 꽃의 관계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서 부활합니다. 42절부터가 그것을 말합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삽니다. 썩을 것은 아담의 형상이고 썩지 아니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삽니다. 욕된 것은 아담의 모습이고 영광스러운 것은 예수님 모습입니다.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이 모두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결국 현재의 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장차 주어질 영광스러운 몸에 관심을 둔다면 현재를 살아가면서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고 얽매이고 힘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차 주어질 영광된 몸에 마음을 두고 살 때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몸은 씨앗에 불과합니다. 잠시후면 사라지고 없어질 몸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장차 주어질 영광된 몸에 관심을 두십시오. 내가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부활을 아는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