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인생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이 인생이란 장차 맺어질 어떤 열매를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씨앗만 바라보지 열매를 바라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인생도 세상의 죽음으로서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 후가 없기 때문에 죽음 후를 위한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흙에 불과한 몸에 모든 목표를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잘먹고 잘살자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는 영원한 나라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제가 한마디한다고 해서 세상을 향한 삶이 쉽게 바뀌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조금이나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있는 신자라면 현재의 자신의 삶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주님께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씀 드린 대로 우리 인생은 씨앗입니다. 우리의 몸도 씨앗입니다. 씨앗이란 열매를 거두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씨앗 자체를 양식으로 삼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씨앗은 열매를 위해서는 필연코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열매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 내가 죽는 것도 거부합니다. 열매를 보지 못하고 씨앗을 바라보면서 씨앗을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열매를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씨앗은 죽고 내일 영광스러운 열매로 태어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씨앗으로 죽었다가 열매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45절에 보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말씀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말하면 '누군가가 살려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불쌍한 존재입니다. 나약하고 힘없는 존재입니다. 드러낼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항상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산 영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산 영이란 생명을 부여받은 몸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살아가지 스스로 생명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부인합니다. 모두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숨쉬고 걷고 말하고 밥먹고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아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48절에 보면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는 두부류의 소속이 있습니다. 땅과 하늘입니다. 땅에 속해 있느냐, 아니면 하늘에 속해있느냐로 인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땅에 속한 자는 아담에 속한 자이고, 하늘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흙에 속한 자는 흙에 속한 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흙, 즉 자기 육신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흙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자기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살려주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외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그 목적을 남을 돕고 살리는 것에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도 자신의 출세가 목적이 아니라 이 공부를 통해서 남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하고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남을 돕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기독교의 최고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남을 돕는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배고픈 자를 도왔다고 해도 잠시후면 다시 배가 고파집니다. 병든 자가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해도 역시 인간은 죽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려주신 것은 단지 숨을 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살려주신 것은 완전한 생명입니다. 죽음이 없는 생명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아무리 귀한 것을 선물 받는다고 해도 죽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이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죽으면 세상의 모든 것과 떨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서 도움이 되는 것을 바라지만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선물 앞에서는 그 어떤 빛나는 것도 빛을 잃어버리고, 제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선물을 아는 신자라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의 것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에 고개를 돌릴 것입니다.
결국 살려주시는 영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고백을 하게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죽는 것은 결코 두려운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선물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찮게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낌없이 돕고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살려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49절에 보면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로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흙에 속한 형상을 벗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나타내야 합니까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나타내야 합니까? 당연히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었다면 그리스도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누구의 모습이 나타납니까? 아담입니까? 그리스도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한몸 살려고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살려주는 영이신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신자는 하나님께 나와서 살려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조차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천국가게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고 살 것입니다. 생명을 부여 받았은즉 생명을 나누어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살려주는 영으로서의 삶을 사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