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활, 즉 인간이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은 세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인간은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은 과학과 의학을 총동원해도 밝힐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지식을 믿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아 홍수를 증명하기 위해서 노아 방주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다는 위치를 찾아가서 방주의 흔적을 찾기도 하고, 방주의 크기를 과학적으로 따져서 세상의 모든 종류의 짐승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과 싸울 때 태양이 멈춘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컴퓨터로 계산을 해보니까 태양이 멈춘 것만큼 시간이 비더라는 등, 여러 가지 인간의 것을 동원해서 성경의 사건들을 사실화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고 그런 노력을 하는 그 사람부터 믿음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의 과학이나 지식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어지면 믿고 안믿어지면 믿지 말라는 것이 믿음의 입장입니다.
부활도 믿어지기 때문에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맹목적으로 '난 부활을 믿는다'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한다'했을 때 왜 부활할 수밖에 없느냐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확실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부활한다'고 했을 때 물론 이 말도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활의 약속을 갑자기 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약속은 성경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근거와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근거와 이유란 세상의 것을 통해서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란 질문을 받았을 때 성경적인 근거와 이유를 말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적인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믿으라는 식의 강요는 극히 삼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신자는 부활할 수밖에 없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5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혈과 육, 그리고 썩을 것이란 우리의 실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변화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변화란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것, 즉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53절에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의 말씀을 보면 몸을 썩을 것, 죽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죽지 아니할 것,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인간은 죽고 썩는 것이 운명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죽고 왜 썩어야 합니까? 이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은 다 이 법칙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가지고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죄가운데 있는 세상의 운명이 죽고 썩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인생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허무라는 것은 예전의 아름다움이 다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을 때 몰려오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죽음과 썩어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고 부요함이 있습니까? 죽음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다 쓸모 없고 의미 없고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썩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라질 것을 위해서 발버둥을 치며 사는 것입니까? 내일 지옥가도 오늘 잘먹고 잘살자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교회에 오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썩을 것, 죽을 것에 미련을 버리고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음식을 오래 두면 썩는 것 같이 사람도 오래 되면 죽고 썩어집니다. 감기 걸린 것 하나도 인간은 죽을 운명임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여기 저기 몸이 아픈 것도 썩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왜 죽어야 하고 몸은 썩어서 사라져야 합니까? 56절에 보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사망은 죄를 향해서 달려듭니다. 죄있는 곳에는 필연코 사망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어야 할 이유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진 자로서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와는 극과 극입니다. 같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생명은 사라지고 생명이 들어오면 죄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처음에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을 때 그때부터 영원한 생명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 인간의 몸은 단지 육체에 불과합니다. 흙으로 돌아갈 육체입니다. 이것이 지금 인간이 죽어야 할 이유입니다. 지금도 어느 누구라고 할지라도 죄를 벗어난 채 산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어 주셨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질문한다면 '당신은 예수님 믿은 후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절대로 안 죽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즉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율법의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세우신 법칙은 죄지은 자는 죽음이고 죄짓지 아니한 자는 영생이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법칙에 의해서 다스려집니다.
그러면 죽은 인간이 왜 다시 살아납니까? 죽은 인간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죄문제만 해결되면 됩니다. 죄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죄가 해결되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심을 통해서 죄가 해결되었습니다. 죄있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라면 죄가 없으면 영원히 산다는 것도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면 율법에 의해서 사는 것은 극히 당연합니다. 사망은 죄를 향해서 쏩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사망이 나를 쏘는 것입니다. 죄는 사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죄가 없으면 사망이 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다시 사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라면 기독교의 관심은 무엇에 두어야 합니까? 썩을 것보다 썩지 아니할 것이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인 수에 관심을 두고 돈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과연 썩지아니할 것에 관심을 둔 사람의 모습일까요?
믿음은 필히 삶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안다고 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바르게 아는 그 앎이 삶이 되어서 여러분에게서 보여질 때 비로소 믿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안다 안다'하지 마시고 아는 것이 삶에서 나를 다스리면서 행함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피십시오. 여기서 행함이란 썩을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썩지아니할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결과가 사망인데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산다는 것에 대해서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우리가 원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그리스도서 완전히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