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하나님의 능력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는 말은 한마디로 '잘난척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는 잘난척 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잘난척 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잘난척 하고 있다면 그것을 '꼴불견'이라고 합니다. 내것이 아닌데도, 내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냥 공짜로 주어진 것을 가지고 내가 잘해서 된 것인양 떠벌린다면 그것처럼 꼴불견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꼴불견'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잘못은 자기들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에게 있는 복음을 자신들이 만들어 낸 복음인양 자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은 사람의 말과 지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합니다. 즉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 낸 말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깨닫게 된 하나님의 일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선포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공부해서 알아낸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로도 인간의 이해력을 총동원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임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도 세상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교회가 많이 오해하는 것이 전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전도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교회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인의 숫자를 늘어나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종교의 목표는 자기 종교의 세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즉 확장입니다. 자기 종교를 추앙하는 종교인이 많이 늘어가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갖은 요령과 수단과 설득력을 동원해서 자신의 종교가 참된 종교이고, 자신의 종교를 믿으면 이런 저런 혜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사람을 설득하는 것으로 이해해 버리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성령이 하신다는 부분이 묵살되어 버립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실 일이나 성령이 하실 일은 내가 말을 잘하도록 나를 돕는 보조자이고, 내가 말할 때 상대방이 내 말을 잘 듣도록 그 마음을 꼼짝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보면 전도 훈련소가 있습니다. 거기서 과연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겠습니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요령, 기술을 배웁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담력을 키우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잘 배워서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은 능력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인간들 속에 하나님이 자리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자리는 인간들이 다 차지하고 거들먹거리고 하나님은 겨우 구석에 자리하나 마련해 놓고 이름만 불러주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만약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사람의 재주에 달려 있다면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는 낙제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가 3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사람들 앞에서는 것조차 겁을 냈고, 말에도 무척 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한 동네, 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로 퍼졌습니다. 이것은 결국 복음의 전파는 사람의 재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 지식을 깨우친 것은 자기들의 능력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복음이란 그러한 것이 아님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나에게 있는 복음을 가지고 남을 무시하는 태도는 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십자가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볼 때도 여러분은 충분히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해와 깨우침이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끝까지 잊으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또 복음을 알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뭔가 잘한게 있으니까 복음을 알게 하셨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여러분이 한가지 조심하고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간혹 같은 신자끼리 모여서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기회가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열띤 공방전을 벌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뭔가 서로 알고 있는 바가 다를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서로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려고 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복음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욕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자기 주장을 굽히기 싫어하는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나는 깨달았는데 너는 왜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쪽으로 나아가면 안됩니다. 나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우시는 은총으로 깨닫게 된 것뿐입니다.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이해를 못할 때 그것으로 그치고 성령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가 깨달은 바를 선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성경을 가지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성경을 이용해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도록 다그치는 시간은 더욱 아닙니다. 윤리를 강연하고 도덕을 말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단 하나, 하나님이 이 땅에 하신 일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것으로 설교자의 책임은 다한 것입니다. 설교자는 단지 설교에 자기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감시해야 하고,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려는 의도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의 도구이고, 그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4절에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합니다. 전도는 사람의 지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성령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까 설교에 대한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깨달은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서 전파하고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를 좀 잘해 가지고 사람들이 복음을 좀 더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설교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여러분이 깨달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먼저 여러분이 버려야 할 유혹은 '내가 잘 말해가지고 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고쳐놓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접근한다면 필경 언성을 높이고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쉽게 안되는 부분이지만 언제나 우리가 명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부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때때로 누군가에게 성경을 바로 가르쳐 줬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거부할 때 참 답답하다는 것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나는 아는데 왜 저 사람은 모르는가?'라는 답답함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답답함이 어떤 답답함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과연 그 사람이 복음을 깨닫지 못한 답답함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맡길 문제이지 내가 답답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것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이해 못할 때 내가 상대방보다 더 위에 있는 위치에서 가지는 답답함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깨달아지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지능을 탓하며 답답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지혜로서 알아지는 것이 아닌데 답답함을 가진들 무엇하겠습니까? 그냥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진심으로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제가 이 말을 여러분께 드리는 것은 행여 성경을 토론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다툼을 미리 조심하라는 의미에서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우리가 설명을 잘해서 잘 전파되거나 설명을 잘 못해서 전파되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아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까? 어차피 우리가 해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면 왜 굳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까?

여기에 대한 바울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로마서 10:14,15에 나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인간은 그 본성이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서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 아닙니까?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란 결국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실 때 먼저 복음을 깨닫게 우리에게 복음을 실어서 전파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이 아름답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의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학식, 지혜 ,능력을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은 그 어떤 노력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능력이 임했을 때만 가능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내가 똑똑해서 십자가를 알게 됐고, 내가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내 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천국가게 되었다는 생각은 제발 가지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십자가와 정반대 되는 생각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1:29절에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목사들 가운데 성역 40년, 50년 하면서 자신이 목사로서 오랫동안 일한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이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했더니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떠벌리는 것도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되었다'는 것이나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고 구원의 시각까지 알려고 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고, 십자가와 전혀 동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편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고 하다보면 결국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을 줄만한 의미있는 사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구원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할만한 모든 가능성을 막아놓고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입니다. 인간의 것은 전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시게 되면 확인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여러분이 보람으로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천국에 전시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몇십년 목사일 한 것도, 기도 많이 한 것도, 전도 많이 한 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단 한가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여러분의 눈에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자랑을 못합니다. 겸손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할 것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감사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미리 알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의 표인 십자가를 알고 있다면 그 증거가 이 세상에서 보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평생을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봐야 하나님 앞에 서면 선고되어질 신분은 '죄인'입니다. '너는 죄인이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고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빠져들어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그 운명을 누가 대신 담당했습니다. 예수님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 아닙니까? 이것이 여러분에게 새로운 말입니까? 여러분이 듣지도 못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잘 알고 있는 말을 이 시간 또 다시 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지 그 자리에 나도 같이 달리기 위해서 십자가로 기어올라가는 삶은 철저하게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하나같이 쓸데없고 허무한 것으로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허무한 것에 매달려서 허둥지둥 살아왔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지 않으려고 이사람과 싸우고 저 사람과 경쟁하면서 쫓기듯 살아온 인생에 환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다면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죄의 병기가 아니라 의의 병기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기를 소원하십시오. 헛된 인생에 마음두지 말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제대로 깨달은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