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6 성령으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령이라는 문제에만 들어가면 많은 혼란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령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영입니다. 때문에 그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면 분명히 보통 때하고는 다른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신자들의 생각입니다. 즉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동적인 일로만 여겨버리기 때문에 성령이 계신다면 마음이 뜨거워진다거나, 방언을 하게 된다거나, 이상한 체험을 하거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점쟁이들이나 무당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점쟁이들도 무슨 귀신의 힘을 빌어서 점을 친다고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영이 나에게 앞일을 말해준다거나, 세상을 뜬 할아버지의 영이 말해준다고 하기도 합니다. 또한 무당들은 신이 내린다는 말을 합니다. 신이 내려서 앞일을 알기도 하고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신비한 힘을 소유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성령을 받아서 신비한 힘을 소유하고 신기한 일을 체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머뭇거리게 됩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한 체험을 한 적이 없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해본 적도 없는 터라 자신이 생각할 때는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성령에 대해서 제일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열심이 없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뭔가 교회일에 예전보다 소극적이고,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남들은 이거다 저거다 해서 정말 신자답게 하고 있는데 나는 단지 교회에 왔다가 돌아가는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스스로에게 낙심이 되고, 나중에는 그 이유를 성령이 안계시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관심을 두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인들도 성령을 이렇게 이해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받은 증거를 은사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고치는 은사가 있으면 성령을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차별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의 차별입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인들을 책망하면서 성령의 일은 그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함과 같이 성령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만약 굳이 성령이 아니고서라도 우리의 지혜를 가지고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성령을 보내셨겠습니까?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그 기준은 방언이나 병고침 등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는 말을 했지만 그 은혜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은혜에 대해서 잘못 알므로 인해서 드러난 모습은 자랑입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해 보이는 은사를 특정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로 여기며 그것을 받은 우리는 특별한 신앙인이라는 자랑을 한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는 어느 한 개인을 향해서만 특별한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베풀어지는 은혜는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다같이 부름받은 자 가운데서 또 누군가를 골라서 특별하신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들은 경제 사정 때문에 어렵게들 살아가는데 내가 하는 일은 별 어려움 없이 잘 되어가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많은 자식들 가운데서 말썽만 부리고 부모의 말도 듣지 않는 자식보다는 공부 잘하고 부모에게 순종 잘하는 자식을 특별히 위하고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사랑을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다같은 성도 안에서도 특별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하시는 하나님이 되버립니다. 이런 하나님이 성경에서 나온 적이 있습니까?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환경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일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평안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편에서 생각하면 언제나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되게 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 되게 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자기를 포기할 줄 아는 법을 배웠다면 그것은 놀라운 복이며, 반대로 평안한 삶으로 인해서 자기를 포기할 줄 아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더 붙드는 쪽으로 나아갔다면 그것은 결국 저주안에 빠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환경이 좋고 나쁘고에 관심두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관심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하는 자입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차이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사느냐에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자연히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은혜에 관심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는 모든 것을 자신의 지식으로 이해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은혜를 생각할 때도 자기를 도와주는 은혜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말해도 그것을 미련하게만 봅니다. 인간을 도와주지 않는 은혜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자기를 도와주고 지켜주는 하나님을 고집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것은 인간의 재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그것을 성령이 함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함께 한 자들이 모인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분쟁이 없고 다툼이 없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다투고 자랑하면서 경쟁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육에 속한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들이 보여진다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은혜를 깨달았으면서도 육에 속한 모습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무조건 싸움이 없이 평화스러운 모습만 있어야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싸움입니다. 저는 이것을 싸움이라고 하기보다는 충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싸움이라고 하면 자기 이득권을 위한 투쟁으로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영과 육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싸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화합을 말한다면 결국 육에 속한 자와도 화합해야 한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양보와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과 육은 물과 기름같은 관계입니다.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충돌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충돌까지 무마시키면서 화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사랑과 화평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로서 함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육의 모습으로 인해서 시기가 있고, 다툼이 발생하는 것을 금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알게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인데 내가 복음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십자가를 알고 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뭐가 있느냐는 생각으로 모인다면 그런 교회에서 다툼이 있을리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자는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로서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는자인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셔서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전에 자기가 자랑하고 내세우던 인간의 힘이나 재주는 모두 배설물로 여겨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아가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신령하고, 열심이 있고, 기도를 많이 해서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고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라고 주장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자는 십자가가 더욱 굳건히 세워지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자는 십자가가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죽어야 할 죄인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살아난 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 모를 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은 잘하면서도 죄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살았다는 의미를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살았다는 것은 너희는 뭘해도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열심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자랑합니까? 왜 자신의 열심을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려고 합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나라 신자들만큼 성령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라면 어느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신령하다고 소문난 기도원, 신령하다고 이름난 목사를 좇아 다닙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령을 받아서 뭘 하려고 하십니까? 성령을 받으면 특별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신앙생활에 열심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성령을 원합니까? 이런 부질없는 일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온유한 사람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안에서 자연히 보여지는 것이 사랑이며 온유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성령을 받아서 새로운 것을 체험하려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깨닫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이상하고 희한한 체험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사도 바울이 다메섹의 자기 체험을 자랑삼아 말한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몰랐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 하늘에서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우리의 똑똑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시고,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듣게 하시고, 사람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신령한 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된 자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나는 아는데 너는 왜 모르느냐'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을 드러내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