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육신에 속한 자

지난 시간에는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십자가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구원을 자기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자랑으로 몰고 갔던 고린도 교회를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을 받은 증거를 은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사를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은사를 받은 자는 신령한 자요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아직까지 수준이 낮은 신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은사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닌데 나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신앙의 수준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성령이 함께하는 기준을 십자가에 두지 않고 은사에 두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설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라는 존재를 정죄합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없는 무능한 존재이고 모두 진노 아래서 멸망을 당해야 할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서는 '나는 무능한 인간이며 죄인입니다'는 고백만이 있어야 당연한데 자기를 자랑하고 신앙의 우월감을 드러낸다면 그곳에 어떻게 십자가가 자리하겠습니까?

오늘날도 보면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붙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을 붙들려고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적으로 고상한 신자되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것보다는 십일조 생활, 또는 술 담배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죄를 말할 때에도 술, 담배, 거짓말, 십일조 안하는 것, 겨우 이런 정도에서 그쳐버리고 십자가의 정신에서 멀어져 있는 죄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을 우월과 자랑으로 끌고 나간 고린도 교회를 육에 속한 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육에 속한 자가 어떤 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린 바울이 영과 육으로서 신앙의 수준에 차이를 두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신자인데도 육신에 속한 자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주를 믿는다는 고백을 한다면 분명히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마땅한데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으면서도 육에 속한 자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육에 속한 자는 구원을 받은 자냐 받지 못한 자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말을 오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의문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고민을 합니다. '나는 분명히 십자가를 잘 이해하고 있고, 십자가 밑에서는 나는 죄인임을 알고도 있고, 나는 무능하며 보잘것없는 인간이며 자랑할 것이 없는 인간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왜 나에게서는 자꾸 자랑이 나오고 시기가 나오고 미움이 나오고 다툼이 나오는 것인가? 나는 영에 속한 자인가? 아니면 육에 속한 자인가? 내가 영에 속했다면 이런 모습들은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육에 속했다면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얽혀서 고민하고 스스로 낙심해 하는 성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고민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고민입니다. 신앙을 자꾸 어떤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수준을 보이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수준 높은 신앙의 기준도 인간의 상식을 가지고 세워놓고 있기 때문에 더 큰 오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매일 성경보고, 큐티도 날마다 하고, 화가 나도 참고, 남을 도와주고, 이런 것들을 수준 높은 신앙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남들은 잘하고 있는데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자신의 신앙 수준에 대해서 의심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의 문제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일단 바울은 지금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에 속한 자, 육에 속한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은 누가 구원을 받은 자냐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영에 속한 자로서 왜 육에 속한 모습을 드러내느냐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둘 다 구원을 받았는데 영에 속한 사람은 신앙이 좋고 육에 속한 사람은 신앙이 나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영에 속한 자라면 항상 신령한 것, 즉 십자가의 흔적이 드러나야 당연한데 어떻게 된게 너희들에게서는 육의 모습이 보여지느냐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너희들의 모습은 영에 속한 자의 모습이 아니다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바울이 육에 속한 자라는 말을 하는 것은, 성령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확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를 따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우월과 분쟁을 보여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지금 너희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영의 모습이 아니라 육의 모습이다'는 것을 책망하고 그들이 십자가로 구원받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고 그 신분에 맞는 삶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아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이해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녀다운 삶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고 천국을 기뻐하는 삶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꾸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살면서 세상 것을 찾고, 세상 것 때문에 날마다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면서 천국의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가리켜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를 젖을 먹는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도 신앙 수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신자들 가운데는 밥을 먹는 수준 높은 자가 있고, 젖을 먹어야 하는 수준이 낮은 자가 있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신앙의 성장을 말하면서 젖을 먹는 아이의 수준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회 안에는 젖을 먹는 자와 밥을 먹는 자를 구별하게 되고 신앙의 높고 낮음을 정해놓게 되어버립니다.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너희를 보니까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꼭 어린아이같이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이면 어른의 행동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 왜 어린아이의 행동을 보이느냐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이면 밥을 먹는 것이 당연한데 너희는 아직도 젖을 붙잡고 있느냐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결국 앞의 말과 동일하게 자신의 신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세상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시기와 분쟁은 영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데 소위 십자가의 지혜를 안다고 하는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 세상 사람들이나 보이는 시기와 분쟁을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교회에 와서도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드러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기와 분쟁이 육에 속한 모습이라면 과연 이 땅에 육에 속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나누인 채로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도 자기를 중심하고 있습니다. 은석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서도 육에 속한 모습은 수시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시기와 분쟁이 있는 그 자체를 가지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십자가의 지혜를 아는 것 때문에, 성령의 은사가 풍부한 것 때문에 스스로를 신앙의 수준이 높은 자로 여기고 자기 보다 못한 자를 수준이 낮은 자로 여기는 그것이 바로 시기와 분쟁 속에 있는 것이고, 세상 모습이고, 육에 속한 모습이고, 어린아이같이 유치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는 십자가를 안다, 신앙이 좋다'라면서 자신의 신앙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그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 가운데 성령의 기준을 열심이나 어떤 행위로 세워놓고 있는 사람들은 열심과 행위만 있으면 자신의 신앙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니까, 매일 성경묵상하니까, 매일 성경보고 기도하니까 '내 신앙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치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기준으로 세워놓고 생각하면 우리는 문제투성이의 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투성이인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기나 분쟁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게 되고 그것으로 남을 비판하는 자리까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에 속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보고 있습니까? 과연 십자가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이 싸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같이 신앙이 우월로, 분쟁으로, 시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쓰레기 같은 인간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자기의 신앙을 자랑하고 드러내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매일 매일 자기를 쳐서 십자가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