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자기의 상

지난 시간에는 육신에 속한 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이 분쟁과 파당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책망하는 것은 신앙의 수준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영에 속한 자라고 하면서 왜 세상의 모습, 즉 사람을 내세워서 파를 가르고 분쟁하는 모습을 보이느냐? 그러면서도 너희들은 자신의 문제를 모르고 스스로 지혜있는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의미의 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모르는 신자,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신앙이 있고 열심도 있고 십자가도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신자, 참으로 문제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신앙의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는 것, 또는 나는 문제가 적은데 저 사람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두가 바로 고린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문제 속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에게서 신앙의 문제점이 보여지면 그 문제가 바로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파를 가르게 된 것은 그들이 어떤 특정인을 위대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위대하게 보았고, 어떤 사람은 아볼로를 위대하게 보았고, 또 어떤 사람은 베드로를 위대하게 보았습니다. 각자 자기 시각에서 누군가를 위대하게 보고 그 사람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자기가 추종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나타내려다 보니 그것이 분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하는 말은 '아볼로는 뭐고 바울은 또 뭐냐 우린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오해한 것은 하나님은 능력있는 위대한 사람을 들어서 일을 하신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나머지 모든 일은 부름 받은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일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빠지다 보니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느냐를 가지고도 사람을 구분하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만큼 능력이 있고 믿음이 있고 위대하니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까지 발전합니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상이 많고 중요하지 않는 일을 한 사람은 상이 적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속히 버려야 되는 것이 바로 일의 경중을 따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는 일을 구분하고, 중요한 일은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 맡고 그렇지 않은 일은 아무 맡겨도 된다는 이런 생각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목사의 일은 중요하고 일반 신자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도 목사의 일과 신자의 일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목사든 뭐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결코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목사고 교사고 다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에 와서는 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보다 성경을 깨달은 폭이 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를 여러분을 돕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말씀 안에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목사는 단지 성경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중개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는 신자로 자라갔다면 그것은 제가 성경을 잘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깨닫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목사님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라게 하신 하나님을 제쳐버리고 사람을 위대하게 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아니면 안됩니다'는 말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계속 목사에게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목사에게 도움을 받지만 밖에 나가서는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나 저나 일에 차이를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도움 받고 돕는 자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나 때문에 저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중개인으로 내세웠을 뿐입니다.

우린 단지 하는 일이 다를 뿐이지 일의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6절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서로 다르게 부름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일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한가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 심는 일, 물을 주는 일, 잡초를 뽑아주는 일, 농약을 뿌리는 일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모두가 농사를 위해서는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물을 주었기 때문에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심었다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때문에 저렇게 자랐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는 여러 가지 도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 상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는 일은 달라도 중요함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상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8절을 보면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이 구절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일하는 대로'라는 말을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는 일에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하는 대로 상을 받는다는 것은 목사는 목사 일을 해서 상을 받고 평신도는 평신도 일을 해서 상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상이 각각 다르지 않고 똑같은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금상, 은상, 동상 이런 식으로 상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은 오직 하나입니다. 영생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이 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단지 저같은 사람은 목사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배워가면서 그 영생을 누리고 기뻐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입니다. 어떤 자리에서든 하나님만 높이는 사람이 상을 받는 것입니다. 상에 차이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일한 분량에 따라서 차별을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면 차별을 두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린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차이를 둘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