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일서 2:1-2)
<설교>
인간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고 해서 죄를 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존재인 것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지나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신자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1-2절)고 말씀합니다.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죄인가부터 알아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면 죄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고치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의 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의 사건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죄를 윤리와 도덕에 어긋난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두고 윤리와 도덕에 저촉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 행동으로 인류가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생각해 보면, 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인류를 죽게 한 엄청난 죄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악은 무엇이었습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과일을 먹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는다면 죄를 범치 않게 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불순종하지 않는다면 죄를 범치 않는 자입니다. 하지만 누가 과연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는 자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탐욕에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인간이 욕심에 지배를 받는 결과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한다면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자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1장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진리가 내 속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가 내 속에 있음으로 나의 불의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아는 것이야 말로 진리로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이 진리에 대해 별로 흥미를 갖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에만 관심을 둘 뿐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죄는 나의 욕심으로 행하는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삶입니다.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우리의 행함과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화목 제물되신 그리스도의 의로써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의를 생각하고 주님의 공로를 높이며 감사하는 그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고 죄를 범하지 않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욕심은 언제나 나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붙듭니다. 주님을 높이기보다는 내 이름과 내 공로가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 자신을 볼 때 마다 다시금 모든 마음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할 당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고 해서 나는 죄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시면 안됩니다. 나의 죄가 여전히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음을 깨닫고 사도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장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1장에서는 무엇을 행하라거나 행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는 행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신앙인의 문제점은 신앙을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는데 있습니다. 종교적 행위가 있는 것 없는 것을 죄를 범한 것 범하지 않는 것으로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전도하지 않으면 죄짓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전도는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필수적인 것을 교인들로 하여금 열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 죄 문제를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전도 안하면 죄 짓는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전도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고 전도를 하도록 그 행위를 유도하고자 하는 발상일 뿐입니다.
설교자는 신자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의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향한 욕심이 이것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결국 설교하면서 죄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신다면 여러분의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죄의 해결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