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요한일서 2:7-11 새 계명과 형제 사랑

<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한일서 2:7-11)

<설교>

신자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자의 특징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른 자들에게서는 절대로 형제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한가를 드러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형제 사랑은 윤리적인 것도 기계적인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높은 자 낮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월이 없고 비교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발이 더러워서 씻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씻어주신 것입니다. 요 13:14-15절을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발을 씻겨주는 겸손을 보여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안에서 제자들은 서로 높고 낮음이 없음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가 흔히 행하는 세족식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세족식을 하지 않아도 형제를 만날 때 높고 낮음이 없이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안에 거하는 형제로 만나면 그것이 서로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이어 요 13;16-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종일뿐입니다. 그 어떤 형제를 만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종으로 만나는 것이지 상대방이 나보다 못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님만이 상전으로 존재하실 뿐, 내가 다른 사람의 상전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복이 있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종으로 형제를 만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기에 예수님의 종으로서 감히 형제의 상전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악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복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 가난한 자, 많이 배운 자 적게 배운 자, 이것은 절대로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은 죄안에서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서로 만날 때 세상의 것을 앞세워서 자신의 우월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임을 서로에게 증거해야 하는데 그것은 높고 낮음이 없는 관계에서의 만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형제를 섬기고 봉사하라고 주신 은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로 높이는 것 또한 어둠에 거하는 모습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행위를 보고 인간을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로마서 2:28-29절에 보면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육신의 할례를 할례로 보지 않고 마음의 할례를 진정한 할례로 본다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도 같은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구약에는 육신의 할례를 중요시하다가 신약에 와서 마음의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변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10:16절의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는 것은 참된 행함이란 마음에서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있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깨달음 심령이라면 행위는 자연히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는 어떤 신앙적인 행위로서 우리를 높일 수 없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신앙적인 행위라는 것으로 서로를 비교하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그것으로 신자의 관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모든 의와 공로가 여호와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힘을 부인하는 것이 곧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행위를 보지 않는 자가 형제를 비교하고 구분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가치는 형제 사랑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처럼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고, 설사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곧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나의 전부를 빼앗기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아신다면 여러분은 능히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제를 대할 때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자인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