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요한일서 4:9-11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본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마땅하도다(요한일서 4:9-11)

<설교>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타내신 것은 무엇일까요? 9절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라는 말씀을 보면 ‘사랑’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어에 대해 무작정 아름다움을 부여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로맨틱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천국에 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타내신 사랑은 세상이 꿈꾸는 환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9절 뒷부분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랑에 로맨틱과 아름다움이란 환상이 담겨 있습니까? 오히려 죽음과 고난만 가득한 것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독생자를 버리신 하나님의 고통과 아들이면서 버림을 받으신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고통과 고난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다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의 문제를 이 정도의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누가 사랑을 받은 자인지, 누가 하나님에게서 난 자인지, 누가 하나님을 아는 자인지를 사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결국 사랑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언급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이러한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의 행함에서 찾고자 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대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문제를 헌금, 봉사, 기도, 전도 등의 행함과 열심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현재의 삶의 환경과 형편에서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7-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신자에게 사랑이라는 행함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도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사랑하자’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자’는 것은 기독교만의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말입니다. 사랑에서 아름다움을 꿈꾸고 추구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는 사랑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면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사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바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형편 환경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다만 자신의 죄를 알고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인한 죄 용서를 아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친절을 베풀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행위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전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위해 나 자신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본질적인 요소를 아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을 수 없는 생명과는 무관한 인간이라는 본질입니다. 이러한 인간성은 재물이나 그 어떤 윤리, 도덕 등 인격적인 요소로 감출 수 없고 고칠 수도 없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깊이 발견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형제를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는 자가 하나님께 속한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모르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한 사랑은 인간에게서 발산되는 자연적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독특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전혀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안다’는 생각은 금물인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랑을 잘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섣부른 단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아주 당황스러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사랑하겠단 말입니까? 만약 보이지 않는 분을 사랑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당황스러움을 전혀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법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즉 주일 성수, 십일조, 봉사, 착한 일, 기도, 성경 읽기 등 이러한 것들로 사랑법이 구축되어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에 당황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데 가서 사랑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데서 찾는 사랑은 모두 사랑을 위장한 가짜일 뿐입니다. 사랑은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그 현장에만 있을 뿐입니다. 즉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거기에만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 오직 나에 대한 사랑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자질이 아예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할 뿐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 그 중심에는 자신이 살아 있습니다. 자신에게 애착을 가지고 자기 챙기기에 바쁜 존재입니다. 남을 도왔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는 자기 보람이 있습니다. 자기 보람을 위해 하는 것이 나쁘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하지 말라고 해서 안하게 되는 인간도 아니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운 일, 즉 착한 일, 친절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되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섬기신 그 사건, 우리 죄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죽으신 십자가 사건에만 존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이 사랑을 알게 되어 있고, 이 사랑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구절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이라는 구절을 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가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사랑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행위에 어떤 의도 두지 않음을 뜻합니다. 또한 자신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용서를 아는 신자에게서는 행위를 근거하고 타인과 비교하고 차별하는 것이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항상 형제를 통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용서에 머물러 살아가는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생명과는 상관없게 된 죄인된 존재가 생명에 속하게 된 은혜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것은 나타난바 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여러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증거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나누어야 할 것 역시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님의 피 흘리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