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한일서 1:4)
<설교>
본문에 보면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에 대한 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서 말씀하고 있고 약속된 바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4절에서 말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같이 주님께는 기쁨이 약속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것에는 이러한 기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에서 이와 같은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다거나 드러내지 못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증인의 생활을 하지 못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떤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까? 만약 사도가 말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의심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기쁨을 배워왔습니다. 일이 잘되어서 돈을 많이 벌 때, 아니면 자식이 공부를 잘했을 때 등등 수많은 경우를 통해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체험한 기쁨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감정적으로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에 대한 상식으로 사도가 말한 기쁨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의 기쁨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예수님을 묵상하고 깊이 생각해도 세상에서 체험했던 그러한 기쁨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사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이가 1등을 한 소식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수준의 감사요 기쁨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마치 내가 믿음이 없는 사람인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2-24절에 보면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리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로 인한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따라서 의로운 자로 여김 받은 가운데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하나님께 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관계에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죄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이 역시 자신감이 없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할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쁨에 대한 오해 때문에 이미 주어진 기쁨을 누리지 못한 상태일 수 있음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배운 기쁨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감정적으로 들뜨게 되고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그런 현상이 없으면 자신에게는 기쁨이 없는 것으로 여기기 십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배운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쁨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사도들의 기쁨과 주님의 기쁨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3절에 보면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여 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주님의 기쁨은 아버지께로 가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쁨의 충만함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감옥에 갇힌 것 자체가 기쁨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 죽는다면 그것은 곧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기에 감옥도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상태를 두고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옥이라는 상황에서도 만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기쁨을 좋게 해주고 즐거운 감정이 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주님을 바라보며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상태인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기쁨의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교인들에게 ‘왜 기뻐하지 못하는가 기뻐하라’고 명령조로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기쁨이란 기뻐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쁨이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까? 기뻐해야지라고 마음먹는다고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고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뻐하라고 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대한 영혼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이 사망에 있던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를 깨닫는다면 신자는 그것만으로 모든 소원이 만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충만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넘치는 기쁨에 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지를 못하고 이론으로 머물러 버리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보다 세상 것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죄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날마다 묵상하며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는 사도의 말은 우리를 사도의 기쁨의 상태에 함께 있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기뻐했다가도 어떤 일로 인해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기쁨이 충만한 상태로 남아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쁨의 충만은 신자에게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즉 기쁨이 신자에게는 능력이며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주변 상황 때문에 변하는 기쁨이라면 참된 것이라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기쁨은 모든 일을 이기게 하고 참고 견디게 하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과연 이 기쁨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굳게 자리하고 있습니까? 흔들림이 없는 그리스도이십니까? 결론은 예수님이 없이는 기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을 맛보는 자로 살고 싶으시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알기를 소원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두고 살기를 힘쓰십시오. 세상을 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나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날마다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로 충만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