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요한일서 1:6-10 죄

<본문>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1:6-10)

<설교>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는 사도의 소식이 어떻게 해서 기쁨이 되어지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찌 보면 전혀 기쁨이라 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말이 신자에게 기쁨이 될 수밖에 없는 그 내용을 살핌으로서 신자로서 기쁨의 의미도 새롭게 정립해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한 기쁨은 기분이나 느낌이나 감정이 결코 아닙니다. 때문에 말씀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 들어도 별 감각이 없는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며 혹시 신자로서 바르지 못한 상태에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염려한다면 신앙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쁨은 예수님으로 인한 만족이며 감사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구원 얻음을 감사하고 예수님이 전부임을 고백하신다면 그것이 곧 기쁨의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물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 예수님은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전부를 주셨습니다. 온 우주보다 귀한 생명을 얻었다면 천하의 모든 것을 얻은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신앙에는 부족함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갈수록 별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피를 흘리실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에서 은혜를 보지 않고 무작정 십자가를 말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현대 교회는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신자를 소극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에 주어진 상태를 말함으로써 적극적인 신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십자가 이후에 주어진 신자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를 간과하고서는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있게 말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항상 죄의식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나의 기쁨이시라는 문제는 죄를 거론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죄문제를 말합니다. 6절의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라는 구절과, 8절의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구절, 그리고 10절의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구절 등에서 죄 문제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말할 때 많은 사람은 악한 행동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러면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죄없다는 말이 되느냐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고,악한 행동이란 과연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라는 물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악한 행동을 한 모든 사람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즉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 사람과 살인을 한 사람의 행위를 동일하게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악한 행위로만 보는 시각은 죄의 본질 자체를 오해할 위험이 다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악한 행위를 죄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어두움에 행하는 것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어둠의 행위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두움 안에서 사는 것 자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으로 살든 윤리적으로 살든 상관없이 누구든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즉 요한은 죄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상태 자체를 죄로 규정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죄는 특정한 범죄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란 것입니다.

죄를 악한 행동으로 보게 되면 악한 행동이 있는 그곳에만 죄가 있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죄는 악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세력, 즉 권세를 의미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죄의 권세에 붙들린 자로 태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둠의 자식으로 태어난 인간이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죄의 세력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에게 미움을 집어넣고, 시기를 집어넣고, 거짓말을 하게하고, 도둑질을 하게 하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까? 사탄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원을 거스리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높이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에게 제시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나, 자신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는 것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을 위해 살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겠다는 것이 사단의 의도인 것입니다.

사단은 이 시험으로 오늘 우리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보다 먹고 사는 문제를 더 앞세우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보다는 나에게 영광이 되어지고 유익이 되는 쪽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이름과 육신의 유익을 쫓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을 두고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서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한 행위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우리의 윤리와 도덕적 사고에서 벗어난 행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죄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를 돌아볼 때 우린 결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입술로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바라보는 것은 세상이고 추구하는 것은 육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를 초월하지 못한 자가 죄에 대해 외면하고 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우리를 평생토록 죄의식에 가두어 두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깊이 누리자는 의도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을 합니다. 죄를 알수록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은혜는 나의 죄에서 풍성히 맛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께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기 위해 죄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말씀한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악하고 불의한 존재로 발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찾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보는 신자에게 예수님은 생명이며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는 주님이 전부이시고 주님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