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삼상 1:1-8 한나와 브닌나

현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은 권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권력 구조로 형성되어 있으며 필히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존재하게 되고 피압제자는 압제자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권력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어떤 차이를 보이겠습니까? 세상은 권력이 통치하는 나라이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권력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 나라에는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의 권력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세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서로 자발적으로 사랑과 봉사와 섬김을 보임으로써 규정되어 질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2-44절에서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권세에 대해서 전혀 다른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지배하는 권세, 다른 하나는 지배가 아닌 섬김과 봉사로 나타나는 권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권세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세가 아니라 봉사와 섬김을 위한 권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섬김을 받기 위한 권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권세 앞에서 굽실거리는 권세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섬기는 권세입니다. 봉사와 섬김을 권세, 즉 힘으로 표현하는 것은 봉사와 섬김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엄청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과연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자인가에 대한 것은 권세에 대해서 어떤 이해로 살아가며 또한 권세가 주어질 때 그 권세가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고 말합니다.

엘가나란 사람의 두 아내가 등장을 하는데 한나와 브닌나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는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두 여인 사이에 싸움이 등장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4-5절을 보면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한나가 자식이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셨는데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조금 줄어들었다 해도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여전히 힘이며 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내것이라는 개념에서 나옵니다. 자기 소유로 주어진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보다 상대적으로 적을 때 자연히 복이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대신 불평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상대방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더 많은 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브닌나는 복받은 자이고 한나는 복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브닌나는 받은 것이 있고 한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한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은 것이 한나에게 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본문은 누가 복을 받고 안받고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뒤에 한나가 기도함으로 사무엘을 낳게 된 것을 두고 기도해서 복을 받게 된 것으로 말하는 것도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한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한나가 기도를 안했기 때문도 아니고, 또 하나더러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자식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있게 하심으로서 인간에게 있는 속성을 드러내시고자 한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자식을 가진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심히 핍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인 엘가나가 한나를 더욱 사랑한 것에 대한 분풀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을 권세 삼아서 한나를 곤란케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브닌나가 자식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한나가 자식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하면서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말한다면 결국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소유에 대한 현대인의 시각은 거의 동일합니다.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보다 나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가 그만큼 나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진 것을 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잘한 자에게 주는 상으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나가 남편의 사랑을 갑절이나 받았다고 하지만 자식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자식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받는 고통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살아있습니다. 이 욕망은 누군가가 가진 자로서 내 옆에 존재할 때 더욱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도 가진 자를 볼 때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신에 대해 낙심하고 하나님에 대해 아쉬움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다른 무엇인가가 보태지기를 원합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사랑보다는 많은 것이 주어지는 사랑을 더 강렬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 가장 귀하신 아들을 주심으로서 나타났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부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내 소유를 계산을 합니다.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하여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전부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보다는 더 좋은 자가용을 소유하고 더 크고 넓은 집을 소유하는 것으로 자기 만족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엘가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갑절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약자를 뜻합니다. 내세울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엘가나가 이러한 한나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은 약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복받은 것으로 말하고 교회 역시 힘을 소유한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말하지만 이것은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복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소유로 인한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의 위에 군림하게 되고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한 것처럼 가지지 못한 자의 마음을 격동케 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임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소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유란 단지 하나님이 맡긴 것에 대한 차이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 더 받았다’는 생각은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결코 자신을 남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소유는 크게 기뻐해야 할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 할 조건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소유로 인해서 나에게서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이 보여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한나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케 하고 핍박을 한다면 그것은 한나가 당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하시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더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격동케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유가 얼마가 되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차별을 가지고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유가 많은 자나 적은 자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똑같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무능함이 소유가 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상은 소유에 의해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고 대접받는 것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대접은 누구에게나 공평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자들도 있고 몸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그러한 삶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러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가난과 장애는 결코 누군가에게 무시 받을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의 고통을 보게 하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소유는 곧 힘과 연결됩니다. 힘은 곧 권세이며 힘없는 자를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권력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유한 자가 곧 권력자로 존재하고 소유하지 못한 자는 소유한 자에 의해 다스림 받으며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와 브닌나를 세워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고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누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약자에 대한 무시보다는 그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한 삶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약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 약자가 되어라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란 소유와 연관이 없습니다. 즉 소유가 많다고 해서 강자고 없다고 해서 약자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유와 상관없이 자신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힘으로 삼지 않는 자는 누구나 약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자신의 약자 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거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약자로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철저한 무능력자입니다. 그 무엇을 소유했다고 해도 여러분의 소유물이 구원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책임지실 뿐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소유의 많음이 권세가 되어서 없는 자를 다스리고 무시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라는 직책에 상관없고 부자 가난한 자라는 소유에 상관없고 검사 청소부 등 직업에 상관없이 동일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절대로 세상의 직업이나 신분 또는 소유로 인해서 차별이 보여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소유에 의해서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결과만큼은 소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삶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날마다 자각하면서 소유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열망하고 힘쓰는 것입니다.

비록 소유가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는 것만을 소유라고 여길 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소유의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눈에 보이는 소유를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입니다. 썩어질 것을 소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참된 소유로 여기며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보이는 소유로 인한 갈등과 싸움속에서 끝까지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쓸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