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삼상 3:1-9 하나님의 부르심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살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특별한 은총이 있었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즉 하나님이 불러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말 그대로 신자에게는 엄청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부르심이 엄청난 은총임을 자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내 발로 예수를 찾아서 믿었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시하는 태도가 있게 된 것에 대해 인간적 사고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야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했다고 하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처럼 하늘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가지고 “○○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이제부터 나를 믿어야 하느니라”는 식으로 음성을 들었다면 ‘그래 나는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스스로도 확신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음성에 의해서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내 스스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찾은 것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를 경시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불러줘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맞게 여겨지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를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이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합당한 모습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은 하면서도 부르심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은 신자로서 과연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일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내용의 초점을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이 중점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드디어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서 제사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그러한 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내용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으로서 이미 부르셨던 다른 누군가가 버려지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적이 드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과의 교통이 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말씀에 대한 무능력과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2절의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늙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엘리가 늙어서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대신 어린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대체하신 것이라는 얘기밖에 안될 것입니다.

신명기 34:5-7절을 보면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 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모세는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늙어 기력이 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했기 때문에 모세와 여호수아를 교체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모세의 할 일이 다 끝났기 때문에 모세의 자리에 여호수아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나이 들어 늙었다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여 젊은 자로 교체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엘리가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엘리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던가 나이가 들어서 제사장의 일을 할 수 없게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단지 사무엘을 쓰시기 위해서 불렀다는 것보다는 어린 사무엘을 부르심으로서 엘리를 지적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부르셔야 한다면 당연히 엘리를 부르셔야 합니다. 제사장은 분명 엘리였지 사무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무엘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7절에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여호와를 믿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절에서 말한대로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말하는 것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과 부르심을 듣고 분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것을 듣고도 그것을 엘리가 부른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에도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엘리가 그것을 깨닫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알려줬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고 있는데 정작 부르심을 받은 본인은 깨닫지 못하지만 엘리가 깨달았음을 본다면 아직까지 사무엘보다는 엘리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무엘을 부르셔서 엘리에게 가게 하시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엘리가 끝났음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엘리를 부르셔야 하는데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엘리가 늙었기 때문에 사무엘로 제사장을 교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엘리가 제사장으로서 살아가지를 않았기 때문에 엘리를 버리시고 사무엘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사무엘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엘리에게 관심을 두는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 때문에 엘리를 버리시는가?’에 관심을 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면 목사나 선교사 또는 장로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목사되고 선교사가 되고 장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로 살아가고 선교사로 살아가고 장로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부르심을 그러한 것으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결국 일반 신자들에게 부르심은 관심 밖이 되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쓰실 그릇으로 삼으셔서 어떤 일을 하시고자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신자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부르신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바로 그분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부르셔서 아들을 믿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를 담아서 보여주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신자는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담고 살아가는 그릇으로서 내 속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에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단순히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마당에 이제 예수님을 증거하고 드러내고 보여줘야 할 일이 제자들에게 맡겨졌음을 뜻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너희가 부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다는 것으로 다 끝난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해야 하는 것이 곧 내가 살아가는 이유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게 된 우리는 과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절실함은 무엇을 향해 있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의 가문을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단순히 제사라는 의식을 주관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직무를 통하여 이스라엘안에 보이시고자 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물이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제사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사는 자신의 삶에 제물의 피가 보여주는 희생의 의미를 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사장 자신이 제물의 피를 통하여 죄씻음의 은혜를 깊이 자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관심은 제물의 피가 아니라 아들들에게 있었습니다. 13절에서 말한대로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에게는 제물의 피가 경시되는 것보다는 아들이 더 중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엘리는 이미 제사장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리를 버리시고 그 자리에 사무엘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단순히 엘리와 사무엘의 직무교체로 이해돼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우리의 전부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보배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는데 정작 우리에게 담겨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엘리처럼 내 자식일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의 좋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속마음은 세상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모른척 해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행동에 열심을 냄으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확인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엘리를 버리시고 대신 사무엘을 세우신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엘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은 엘리의 마음에 제물의 피를 담아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를 담아두기 위한 그릇으로 삼기 위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에 필요한 것은 제물이 흘린 피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필요로 하십니까? 물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들이 결코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을 두고 생각한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필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담아서 전달할 그릇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과 함께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에 대한 우리의 욕심을 버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요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세상 것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의 피에 대한 마음보다는 세상의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합니다. 결국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절실함이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마음일 뿐입니다. 혹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9절에 보면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고 말합니다. 종의 자세는 여호와께서 말씀할 때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단순히 나무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남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세상의 화려함을 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이 없습니다. 항상 부족을 느끼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은총과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신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절실한 소원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