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삼상 3:10-14 말씀으로 사는 것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기 전에 이 내용이 의미하는 것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에 대해 예사롭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단정하고 책망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신자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말씀을 경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 자체에 관심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의 마음 자세를 새롭게 하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무엘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이었음을 안 것은 엘리였습니다. 그리고 엘리가 사무엘에게 다시 또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하라고 지시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이 여호와였음을 아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께서 제사장인 자신을 제쳐두고 어린 사무엘을 부를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사무엘을 부르는 분이 여호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사장인 자신을 제쳐두고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진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제사장으로서 어린 사무엘에게 밀린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무엘에게 가서 누웠다가 다시 부르시거든 어떻게 하라는 것에 대해 가르쳐준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고 대신 사무엘을 택하셨음을 깨달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어쨌든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말씀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긋난 길로 갈 때 그것을 책망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엘리는 아들들의 죄악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금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을 아는 제사장이었으며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금하지를 않았다는 것이 엘리 집안에 임한 심판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리기를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과 제시하는 것에 대해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말씀을 대하는 신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기도를 하지 않았다거나 성경을 읽지 않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알았으면서도 말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 중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를 포함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여러분보다는 말씀을 많이 또는 깊이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분명 아닌 것이며, 입으로는 복음을 증거하되 삶에서의 저의 움직임은 말씀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될 수 있기에 특히 저는 더욱 더 저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말씀의 적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곧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실천되어지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실천하는 문제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적용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하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적용시켜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필요 없는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것을 기독교의 전부로 또는 중심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말씀에 잘 순종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를 그렇게 이해해 버린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 내용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의 본질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삶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내용을 조금 실천하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며, 더군다나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허무맹랑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엘리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을 그대로 이루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지금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가실 것임을 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품이 좋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답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단지 종교인의 겉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신자가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줬다고 합시다. 과연 그것으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다. 그 사랑을 아느냐?’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 사람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오히려 말씀의 인도를 벗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알면서도 죄를 금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모르는 자도 아니고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종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들들의 죄를 금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했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말씀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가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를 아는 자였다면 그는 아들들의 죄를 미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책망하면서 금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죄를 알되 죄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죄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가 무엇임을 알고 죄를 미워하고 죄의 길을 가는 자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이러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을 단순하게 윤리나 도덕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을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세상이 가지고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 역시 세상을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어떻게 죄악의 세상에서 죄에 대해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는 함께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믿지 않고 자기들의 능력과 힘을 최고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세상의 죄를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한답시고 좋은 일을 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교회다니라고 전도한다고 해서 세상의 죄가 증거 되어지겠습니까?

신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세상에 전달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이것을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엘리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하나 엘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그의 생각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금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고 그 결과가 심판인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가진 채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엘리는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가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나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신앙의 덕목으로 여기는 말씀의 적용이니 실천이니 하는 문제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눌 때 그 마음에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가는 길로 따라가게 함으로서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지 않았다는 것은, 제사를 멸시함으로써 저주를 자초하는 아들들의 죄를 금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들들의 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제사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마음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생각이고 뜻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그 뜻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내것으로 삼고 살아가겠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의 대부분은 열심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열심이 없고 남들처럼 봉사하지 못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자책감을 가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을 신자로 여기실까라는 의심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시는 것은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노력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 올바른 길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게 되면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의 관심을 생명과 연관된 진리의 길로 이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는 자로 살아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살아가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심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나눈 자로 살아가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