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삼상 3:15-21 사무엘과 엘리

갈라디아서 5:1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을 주장하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우린 이 말을 사도 바울의 심정이 되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곧 율법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율법 준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삶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율법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의가 됨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바울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말씀을 듣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전하는 자의 고충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전혀 다른 반응으로 저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저로서는 바울의 입장이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전했다면 바울은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출신성분이 남다른 자로서 한 몸에 존경을 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라고 말함으로써 비록 자신에게 핍박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듣는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 할지라도 복음을 복음대로 전하는 것이 그의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거치는 것으로 작용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아닌가가 판별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지시한 대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선포하십니다(1-14절).

그런데 15절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에게 들은 말씀을 엘리에게 고하지를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는 엘리가 들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분명 사무엘에게만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 집에 대한 예언을 엘리에게 직접 하지 않으시고 어린 사무엘을 전달자로 내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단순히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인 엘리에 대한 심판을 어린 사무엘을 내세워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은 사무엘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엘리에게도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엘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께 들은 대로 가서 말해주면 되는 것인데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제사장이며, 더군다나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말입니다. 그러한 말을 쉽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누군가에 대한 심판에 대해 예언을 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마음에 갈등도 없이 가서 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여러분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나쁜 말은 감추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전하는 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예레미야란 사람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선포하면서 눈물로 회개를 촉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는 길이 곧 멸망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않기를 눈물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들 한번 혼나봐라’는 심정으로 재미 삼아, 또는 고소하다는 마음으로 심판에 대해서 선포하는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라고 해서 선포해야 할 말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야 할 말을 안한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듣는 자가 기분 나빠할 것을 염려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자신이 선포해야 할 말이 이행하기 힘든 것일 때, 자신 한 말을 따르지 않을 때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 눈물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말대로 하든가 말든가 모르겠다는 식이라면 절대로 진정한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선지자의 사랑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말리고 그들의 길을 돌이켜 진정한 생명이 있는 길로 이끌고자 하는 열정으로 드러납니다. 설사 자신에게 돌이 날아오고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랑은 절대로 인간의 친분관계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형제들이 멸망으로 가는 것을 말리고 생명으로 가기를 촉구하는 것, 그것이 선지자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물은 그들이 얼마나 애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길을 가는 신실한 말씀의 설교자라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은 저에 대한 경고로 삼고 싶습니다. ‘과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 설교했던가? 길이 아닌 길을 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애타하는 마음으로 호소를 했던가?’ 이러한 물음을 제 스스로에게 하면서 제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정립하고자 합니다.

설교자가 신실한 말씀의 설교자라면 왜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신의 죄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죽어가는 사람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진심으로 진리만을 선포하게 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실한 말씀의 설교자여 하나님의 말씀의 일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설교자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질 것을 원해서입니다. 설교자란 목사를 말합니다. 목사는 곧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입니다. 저는 결코 목사를 교회나 부흥시키고 발전시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크게 하지 못한 저의 무능을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될 때부터 이러한 생각이 저를 붙들었습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고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목사를 교회를 발전시키는 기능인으로 바라본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힘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작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모이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며 교회를 이루는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가운데서도 돌이키지 않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애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진정한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참으로 착잡한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돌이키지 않는 모습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어느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을 볼 때 그것으로 위로를 얻고 기뻐하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두고 두려워하는 것에서 선지자들의 말씀이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어려운 일이었던가를 길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시면서 아무쪼록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자들이 서로 만나게 되고 교제하게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설교자를 이해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통해서 서로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받은 예언은 그 어떤 것보다 전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님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앞으로 많은 복을 받고 잘 되실 것이랍니다’라는 말을 전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제사장님 집안이 영영히 심판을 받을 거랍니다’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앞으로 선지자로서 계속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으로서의 첫출발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제사장 집에 대한 심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은 엘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두려워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무엘에게 엘리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말하라고 합니다. 17절에 보면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말하라고 합니다. 만약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너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하신 자신의 집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엘리의 이러한 말이 쉽게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8절의 말은 그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의 말을 들었을 때 원망을 하거나 심판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애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자신의 심판이 하나님이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에 대한 심판도 하나님의 선하신 소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등장한 엘리는 분명 믿음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엘리가 심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여호와의 선하신 소견대로 할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분명 심판에 대해 들었을 때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옛날에 존재했던 한 인간의 마지막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서 살았던 사람들을 내세워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복이 있다고 칭찬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해야 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그리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내용들이 베드로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는 말 한번 잘해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는 엄청난 말을 들을 반면 또 다시 말한 번 잘못해서 사단이라는 엄청난 책망을 들은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였다가 다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단이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베드로 한 개인의 믿음의 문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내세워서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도 이러한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엘리같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보다는 무엇이 말씀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자세인가를 가르침 받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사무엘과 엘리의 관계를 통해서 설교하는 저와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설교하는 저와 여러분은 매우 곤란한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저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성령이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해야 하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설교자의 곤란함이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이 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곤란한 점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설교자가 말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의 기분을 생각해서 말을 바꾸거나 빠뜨릴 수 없는 것처럼 설교하는 사람은 듣는 신자의 기분과 입장을 생각해서 말씀을 바꿀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진정한 신자라면 설교자에게 ‘말씀을 그대로 전해달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를 기분좋게 하려고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거나 바꾸면 당신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기를 원한다’는 단호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이 생명임을 알고 말씀을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그대로 전해달라고 원한다면 그것은 말씀의 귀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음을 알기에 그러한 요구를 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심판하는 말씀이든 책망하는 말씀이든 말씀을 그대로 전해달라는 단호한 마음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간혹 말씀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을 봄으로 인해서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반발을 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해져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그 일을 맡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도 전하고 다른 것도 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설교자에게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맞는 말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면 말씀안에서의 만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하나됨과 통일은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생각이 일치 될 때 그것이 곧 교회의 하나됨이며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한몸된 교회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코 인간의 친분과 인간적 관계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모든 관심을 두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마음은 모두 버리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저주하기를 원한다’는 단호한 심정으로 말씀을 대하십시오. 이것이 말씀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