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고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때 반공에 대한 포스타를 그리라고 하면 총 들고 늑대처럼 생기고 뿔이 난 사람으로 그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저뿐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학생들 가운데는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고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과 남한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상의 차이고 이념의 차이일 뿐 이쪽은 좋은 나라 저쪽은 나쁜 나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을 나쁜 나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과연 그들이 우리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옛날 남한을 침략한 전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좋은 나라고 너희는 나쁜 나라라는 구분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북한’하면 그저 무작정 나쁜 나라’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다만 그동안 머리에 박혀 있던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과 대표적으로 대립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블레셋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그래도 뭔가 이스라엘은 좋은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마치 북한과 같이 머리에 뿔난 그런 악한 나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은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국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블레셋은 사실상 이스라엘보다는 우월한 국가였습니다. 군사적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이스라엘보다 앞선 국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감당할 수 없었고, 또 블레셋은 자신의 땅을 넓히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과거의 역사가 땅을 넓히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은 아주 질이 나쁜 악한 나라고 이스라엘은 선한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이 두 국가의 관계를 대한다면 이들의 관계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오류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을 대할 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와 믿는 나라라는 관계에서 봐야 하고, 그럴 때 이들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 두 나라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에 있어서 만큼은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스라엘은 수많은 전쟁을 했었고 그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들보다 더 막강한 상대들을 이긴 경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전쟁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상대에 대해 승리하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을 때는 상대 여하에 관계없이 패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패여부는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싸움에서 패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뭔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할 때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을 전혀 잘못된 것으로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천 명이라는 군사가 죽는 패배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믿는 민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때 다른 나라가 싸움을 걸어와도 참고 평화를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데 이스라엘은 마치 싸움을 즐기는 것처럼 전쟁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할 때는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진멸시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성경은 왜 이처럼 전쟁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현대 사회는 평화를 외칩니다. 전쟁이 없고 평화만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 현대인에게 이스라엘의 전쟁의 역사는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전쟁을 통해서 가르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을 내세워서 이방인을 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는 상대는 하나님의 적이며 원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당연히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때 승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패배를 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지금 식으로 말해본다면 우리가 교회다니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편이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교회를 다니니까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을 많이 가집니다. 이것부터가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리와 함께 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그런 존재인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사랑해달라고 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나는 어떤가?’를 살피는 것은 생략해 버리고 다만 사랑해주고, 도와주고, 함께 해달라고만 요구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더 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여 우리를 치시기도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뭔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악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치시기 위해서 블레셋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패배의 이유는 군사력에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군사력으로 싸우는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국가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조건 승리했고 함께 하지 않으면 무조건 패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패배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뭔가 악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악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3절에 보면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먼저 전쟁에서 패한 것이 하나님이 패하게 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왜 패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들에게 실패를 경험하도록 허용하신 이유를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백성으로서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 실패했다는 것만 생각하며 낙심하기보다는 실패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임을 생각하며 ‘왜 실패하게 하셨는가?’를 스스로 물어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삶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는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으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함으로써 나의 모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아주 유익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 대해서 감사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런 좋은 일을 주셨구나’라는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문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야 하고 나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패와 어려움에서 기껏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뭐가 잘못해서 그것을 고치고 회개하라고 이런 일을 주셨는가보다’라는 답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답을 내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왜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답은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고 우리끼리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우리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를 도와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그들 가운데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언약궤를 어떤 효험이 있는 궤로 여기고 언약궤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저절로 자기들과 함께 하고 도와주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세가지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깨어진 돌판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써 주어진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이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도전했을 때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남으로써 하나님이 택한 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던 아론의 싹 지팡이입니다. 이 세가지가 언약궤에 들어있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죄가 언약궤에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릴 때 그 언약궤에 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는 것인데, 당시 이스라엘은 언약궤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언약궤 자체만을 두고 어떤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자신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도구로 이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언약궤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자신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생각하는 미신처럼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나 주문에 의해서 호출되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특정지역에 국한되고 특정한 국가의 신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나와 함께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함께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지성소 언약궤 등과 제사장의 희생 제사에 대한 의식과 절차 등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지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는 자연히 쇠퇴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 자체를 믿어버리는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치시는 이유를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대신 언약궤를 앞세워서 자신들의 실패를 만회해 보려는 악한 의도만 보였을 뿐입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폭로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언약궤가 보여주는 것은 언약궤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가 과연 누구의 죄 때문에 뿌려지는 것인지를 피로써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언약궤를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내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은 블레셋을 내세워서 그들을 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블레셋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오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언약궤가 있으니까 이제는 이겼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던 블레셋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온 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신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으로 왔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이 온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신의 힘을 발휘하는 효능이 있는 궤로 보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동일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두려워하지 말고 대장부답게 나가 싸우자고 스스로를 독려하고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삼만 명이 죽고 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게 됩니다. 언약궤를 믿었지만 전쟁은 패하고 궤는 빼앗기고 제사장은 죽습니다.

이것은 언약궤가 있으니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패배를 통해서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어야 하는 것은 언약궤가 아니라 제물의 피였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이나 행함들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덮으신 예수님의 피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고 교회안의 여러 가지 것을 믿는다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일을 잘되게 하고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믿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져도,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주님의 일은 이루어졌음을 믿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때로 우리에게 괴로움으로 남을 수 있고 짐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홀로 지신 주님을 생각하면 감당치 못할 짐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에게 내 짐을 내려달라고 가볍게 해달라고 해결해 달라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신 짐을 나도 같이 지고 가게 해달라고 구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것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