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삼상 4:5-11 이스라엘의 하나님

오늘 설교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대개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등등으로 이해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설교 주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삼만 명이 죽고,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죽는 실패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분이시라면 그토록 큰 실패를 하도록 하지 않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블레셋이란 이방인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있게 부르실 수 있습니까?

이것을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일로 보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로 빗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며 항상 모든 일이 잘되게 하시는 분으로 상상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기분 좋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실패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하는 일에 실패하고 참으로 다른 사람보기 민망할 정도로 실패를 했다고 할 때, 과연 그 실패의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자존심 때문에, 하는 일이 안되더니 신앙까지도 망가졌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억지로 웃으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말고, 진심으로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백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신앙에게서만 볼 수 있는 능력이며 힘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러한 힘이 없기 때문에 환경과 생활의 영향을 수없이 받으면서 좋을 때는 웃었지만 좋지 못할 때는 하나님조차 생각하기 싫을 정도가 인상을 찌푸리며 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래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우고 깨달음으로서 신자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능력과 힘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새롭게 회복되어지는 시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과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민족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식은 하나님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이기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되어지는 일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일어납니다. 1차 전쟁과 2차 전쟁 모두 이스라엘이 패합니다. 1차 전쟁에서 군사 사천 명이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2차 전쟁에서는 삼만 명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어야 합니까?

혹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었다가 다시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위치로 돌아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분명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이리저리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면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신실하신 분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을 국가적 차원의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차원에서 의미하는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런데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불려지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는 신자로서 어떤 실패와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패와 고통들이 하나님과 어떤 연관속에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됨으로써 실패속에서도 나를 붙드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멋대로 상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죄악의 세상에서 배운 상식대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조차도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고 해석을 해버리는 관계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하나님은 아예 우상의 수준으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이것부터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대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에 육신의 문제를 덧붙입니다. 즉 우리들의 영혼과 육신의 문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죽음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육신의 문제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화를 내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수 십년 교회를 다녔는데 왜 이런 일을 있게 하느냐?’고 얼굴을 붉히며 반발을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바친 것이 얼만데 이렇게 하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결국 조그마한 고통으로 인해서 인간의 믿음 없는 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악한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하심을 겨우 수 십년 교회 다닌 자신의 공로와 빗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피는 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지금도 피흘리시는 예수님을 보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에게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과 힘을 볼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내 문제를 좀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제발 돌을 떡으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스라엘에게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을 언약궤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워서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는데, 그런 신비의 궤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패배한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그들의 진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기적의 힘이 있는 언약궤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에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흘린 희생의 피를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물의 피가 무엇을 덮고 있는가를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비의 힘이 있는 궤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오늘날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들의 실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부르는 것이나 우리가 십자가를 부르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에서 죄에 대한 용서를 보지 않고 다만 자신들을 위한 신비한 힘을 기대한 것이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죽으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보지 않고, 그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신비한 능력을 발휘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착각에서 건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가져왔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먼저보다 더 큰 패배를 하게 함으로써 언약궤가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패한 원인을 언약궤를 가져오지 않은데 있는 것으로 분석했지만 언약궤가 있음에도 패하게 하심으로써 원인은 다른데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혹시 내가 십일조를 안해서 하나님이 어려움을 주신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십일조를 열심히 했지만 어려움은 계속되고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우리들이 하는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것이 결국 육신의 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도착하고 온 이스라엘의 사기가 충천합니다. 힘이 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있으니 이제 하나님은 우리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면서 힘을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일이 되어지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힘이 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힘을 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도하면서 힘을 내고, 봉사하면서 힘을 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란 언약궤가 있다고 해서 힘이 나는 이스라엘과 같은 수준입니다. 그러한 힘은 잠시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힘을 내고 사기가 충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했을 때 힘이 나는 것은, 기도한 자신의 행위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도한 나를 기쁘게 보실 것이라는 착각에 의해서 힘이 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힘은 그 어떤 어려움도 환경도 이기지 못합니다.

진정한 신앙의 힘은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신앙의 힘이라면, 이러한 힘은 어려움이 없을 때는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망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한다면 어려움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앙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육신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을 그들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이스라엘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고 말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부터 제물을 자기들 마음대로 취함으로써 제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마다 저의 심령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분명히 새겨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한다고 해서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싫어한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고 쳐서라도 죄에서 건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을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치기도 하시고 질고와 곤핍함으로 이끌어 가기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이 스스로 힘을 모아 큰 일을 해보자고 하지만 인간의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들이 힘으로 모아서 탑을 쌓았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내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블레셋도 보면 이스라엘 진영에 언약궤가 들어왔을 때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한 것이 아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9절)는 말로 스스로를 독려하고 힘을 모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소위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신이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힘이 없을 때 자신들이 믿는 신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이런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행여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기도하면 힘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언약궤를 보면서 힘을 내는 이스라엘의 수준과 같음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러한 신앙에 머물러 있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서 볼 것은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볼 것은 그분의 희생과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힘이 되는 것이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승리하게 하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보면 마귀를 거짓말쟁이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신자에게 거짓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에 빠지게 합니다. ‘열심히 하면 복받는다’는 거짓에 빠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참된 하나님을 좇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피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그가 참으로 힘있는 신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