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삼상 4:12-22 이가봇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형편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판단합니다. 환경과 형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는 것을 인식을 하고, 반면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보다 형편없다고 여겨질 때 끝없는 불행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환경과 형편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누리는 모든 환경과 형편, 즉 자신의 모든 것을 종합해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하나라도 있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소유로 인한 모든 기쁨을 박탈당해 버리고 상대적으로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은 마음껏 쓰고도 남을 정도로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는데 자식들이 공부도 안하고 망나니 노릇을 하면서 부모의 속을 썩일 때 그 부모는 물질의 풍부함으로 인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돈은 없어도 번듯한 자식을 두고 살아가는 부모를 볼 때 그들이 더 행복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돈이 없어서 항상 곤란을 당하지만 자식들은 공부를 잘하고 착할 때 그 부모는 항상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도 돈으로 인해서 곤란과 고통을 겪을 때 돈있는 자가 행복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없이 불쌍한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결국 돈은 있으나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사람은 착한 자식을 둔 부모에 비해서 자신이 불쌍하다고 여겨질 것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덕분에 호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갑자기 가난한 부모를 둔 자신이 초라해지고 불쌍히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많은 사람들은 서로 저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본질은 불쌍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불쌍함은 인간의 운명이 사망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육신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끝이 없는 영의 사망까지 인간에게 주어질 몫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불쌍함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진리에 서서 보면 진짜 불쌍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불쌍함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 가문이 몰락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엘리 본인과 자기들과 며느리까지 죽어 버리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식구들이 하루아침에 죽는 것이 불쌍함의 전부로 봐서는 안됩니다. 물론 한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불쌍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쌍함, 즉 동정으로 끝날 뿐입니다.

TV를 보면 날마다 사고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화재로 인해서, 또는 교통사고로 인해서, 아니면 수해로 인해서 일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불쌍하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당한 그들이 불쌍한 것이지 나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얘기는 이러한 시각으로 대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한 제사장의 가문이 잘나가다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일가족이 다 죽는 것을 보면서 ‘참 안됐다’ ‘불쌍하다’는 동정심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는 엘리가 불쌍한 존재로 보여진다면 엘리의 불쌍함에서 오늘 우리들의 불쌍함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문을 엘리 제사장 한 개인의 일로 여겨서는 안되며, 단지 한 가문이 몰락하는 것으로만 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전하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언약궤 옆에 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합니다. 이 사실을 진중에서 나온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알릴 때 엘리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 엘리가 의자에게 자빠진 것을 보면 언약궤를 이방인인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것이 제사장인 엘리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었는데 언약궤를 빼앗기고 시부인 엘리가 죽고 남편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배가 아픈 후에 아들을 낳은 후에 죽게 됩니다. 죽어갈 때 곁에 있던 여인들이 아들을 낳았다며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였지만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며 아이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고 짓게 됩니다. 시부와 남편이 죽고 또 언약궤를 빼앗겼음으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 가문의 이야기를 볼 때 참으로 불쌍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엘리라는 이스라엘의 옛사람의 가문에 있었던 일화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엘리 가문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엘리의 불쌍함이 곧 우리 자신의 불쌍함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쌍하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의 처지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현저히 차이가 날 때, 다른 사람은 잘사는데 자신은 고난과 고통으로 살아갈 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불쌍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들에 비해서 비교적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살아갈 때, 부족함이 없을 때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불쌍히 여기든, 여기지 않든 세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무지함에 있는 것입니다.

엘리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려져 죽은 것은, 물론 자식이 죽었다는 것도 큰 충격이겠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이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엘리는 소식을 전하는 자가 언약궤에 대해서 말할 때 의자에서 자빠진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제사장인 엘리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언약궤를 빼앗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비느하스의 아내도 22절에서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것이 제사장 가문에게 있어서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를 빼앗긴 것이 왜 이처럼 충격적인 일입니까? 그것은 언약궤를 빼앗긴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하나님이 그들이 함께 하시는 영광의 궤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중심이며 그들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언약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언약궤에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의 대표자였던 엘리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엘리 가문의 불쌍함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 되는 언약궤가 그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불쌍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갓낳은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이가봇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뜻이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저주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과 같은 존재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한 비느하스의 아내의 심정도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는 우리의 말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십자가를 말하는지, 십자가의 의미가 내 마음속에 생명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십자가를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든 말든 세상의 것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으로 마음 든든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이 자신의 불쌍함이 아니라 세상 것이 없는 것이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만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중심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데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진정한 불쌍함이 무엇인가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불쌍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고 행여 우리가 그러한 불쌍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를 주시고 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죄로 인해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는 인간에게 내려주신 유일한 생명의 길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그 길로 인도해 가는 것이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언약궤도 제사장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저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고 생명의 길이 사라졌으니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끊어진 저주의 자리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용서받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죄 용서 받을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을 때 언약궤에서 자기들의 생명의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블레셋을 이기고 승리하는 힘만을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시고 제사장을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사라질 때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간의 이러한 처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그렇다 쳐도 심지어 믿는 신자들조차도 생명의 길이 없을 때 인간의 처지가 어떠한지에 대해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공기가 없으면 죽는데도 숨쉬는 공기가 풍부하게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처럼 구원의 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저주에 처할 수밖에 없는데도 예수님이 안계신다면 우리의 처지가 어떠할지 그 심각함과 우리의 불쌍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시고 제사장인 엘리 가문도 다 죽게 함으로써 구원의 길이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없는 이스라엘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풍요롭게 살고 배부른 자로 산다 할지라도 그들은 불쌍하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언약궤도 제사장도 이스라엘에게서 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과연 누가 불쌍한 사람으로 보여집니까? 지하도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동전 하나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불구자나, 노인들이 불쌍하게 보입니까? 그렇다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던 예수님도 돈이 없어서 불쌍하신 분입니까?

인간의 불쌍함은 소유가 적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불쌍함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저주아래서 건짐 받을 수 없는 운명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구원의 길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구원의 길이 사라져 버린 우리의 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언약궤와 제사장이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의 처지와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것은 구원의 길이 없고 저주 아래 있던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감사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분이 있다고 해서 섣불리 그들을 불쌍히 보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에서 그러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힘들게 산다고 해서 불쌍히 본다면 결국 힘들게 살지 않고 모든 것을 갖추고 편하게 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활이 힘들다 해도 그 분의 마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와 기뻐함으로 살아간다면 그분은 절대로 불쌍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자입니다. 행복자라면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으로 기뻐한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행복자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생활이 곤란하고 환경과 형편이 자신이 보기에 나쁘다고 해서 불쌍하다 한다면 아무것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 부유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비참함은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멸망으로 끝날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세상의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택하신 자기 백성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자에게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며 그 길을 걸어가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소유 여부를 떠나서 성공한 자며 행복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과 기쁨과 감사를 알고 살아간다면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러한 기쁨과 감사를 맛보며 살아가십니까? 진짜 불쌍한 것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