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삼상 5:1-12 다곤과 하나님

세상은 온통 전쟁터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누르고 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고 경계하면서 자기 한 몸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전쟁터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보같이 굴면 언제 누구에게 당할지 모르는 곳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순박한 시골 사람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으로 표현하기도 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눈뜨고도 코 베어 가는 곳’으로 표현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점차 살벌해져 가는 삶의 현장을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살벌한 삶의 현장이 서울 시골로 구분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시골도 나름대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눌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더 능력있고 재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날마다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잘못되어야 내가 산다는 생각 아래 항상 누군가를 저주하는 입장에서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 세상사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거나,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사치스런 이상으로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아직까지 삶의 현실이라는 뜨거운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에 파묻혀 있다는 비난만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삶의 전쟁터에서 믿음이 이러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한낱 이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신뢰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겨야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이기기 위해서 믿음을 선택하고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인 신이 자신에 대해 소홀히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성의를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신은 자신을 이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신에 대한 염원이며 소망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정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승리를 위한 믿음’ 이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폭로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짓밟는 세상에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서 승리하는 영웅으로 위대한 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하고 나약하고 패배하는 모습으로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예수님을 부르면서 ‘내가 이기게 해달라’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길 것이다’는 성경과는 전혀 거리가 먼 헛된 공상에 빠져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피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밑에서 여전히 다른 사람의 피흘리는 것은 상관없이 내가 승리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예수도 아닙니다. 이것은 깨닫지 못하면 결국 다른 예수를 찾다가 망하는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결코 이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함께 하신 성령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는 것만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 잘못 없이 손해를 봐야 하고, 애매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일에 대해서도 참지를 못하고 분통이 터지는 것이 우리들인데, 지는 자로 살아라는 말에 대해서 달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가는 길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고 주님이 이끌어 가지 않으시면 가지 못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기기 위해 살아가지 마십시오. 이겨야 한다, 내가 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해서도 승리를 요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지는 것은 실망과 낙심과 좌절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 마지막을 지는 자로 보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지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곧 예수님이 가신 길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백성이 원하고 기뻐하는 대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주실까요? 우리는 그것을 원할지 모르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으로 인해서 수만 명이 죽는 패배를 맛봐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에 설교한 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패배하게 하나님인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이런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 역시 이기기 위한 승리의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악한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부를 뿐이지, 자신들을 패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상상조차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도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근처의 다른 교회가 경쟁자가 되고 그들을 이기고 누르기 위해서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웃지 못할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진심으로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라면 서로 다른 교단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서 형제 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식이 아버지에게 나는 살려주고 다른 형제는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사랑만 베풀어주는 아버지로만 여길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는 이러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으로만 믿으려고 한다면 결국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종교는 신들의 싸움이라고 해도 맞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는 서로 자기가 믿는 신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의 화해를 주장하는 무리들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종교의 화해는 결국 다른 종교도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대상은 각기 다르다고 할지라도 추구하고 목적하는 바가 같으면 모두가 선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우상과 같은 반열에 놓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대의 교회입니다.

모든 종교가 서로 화해를 하든 말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이기에 상관할 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높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현대 종교는 신들의 싸움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가 더 잘되는가를 잣대로 해서 자신이 믿는 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집안보다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 더 잘될 때 하나님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에 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다곤이 더 세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은 그러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1-2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인 다곤의 신상 옆에 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설사 전리품으로 보관을 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창고 같은 곳에 두면 될 일을 굳이 다곤 신상 곁에 언약궤를 둔 것은 우리의 신인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보다 더 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에 대한 생각은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앞세우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들의 편을 들어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블레셋 역시도 신에 대해서는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언약궤를 빼앗았다는 것을 하나님을 이긴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생각만이 아니라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공통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패배한 것을 보면서 ‘역시 우리의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보다 더 세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이러한 생각으로 신자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 모양으로 살아가느냐?’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있는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을 안믿어도 이렇게 잘되기만 하는데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하나님을 찾는 너는 왜 하는 일마다 안되냐? 혹시 가짜 신자가 아니냐?’라는 조롱 섞인 말들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참으로 분통이 터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롱을 받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분이 나기보다는 내가 조롱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 때문에 분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패배한 것입니까?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자녀는 대학에 다 들어갔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녀는 반밖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처라는 신적 존재에게 패배한 것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문이며 유일한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우월한 피조물은 있을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기는 것도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곤 신상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고 말합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다곤 신상 곁에 둔 이튿날에 보니까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우연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에는 역시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고 이제는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곤에게 패배한 신으로 여기는 것이 화가 나서 내가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도 역시 아무것도 아닌 우상과 싸우는 그런 분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곤 신상을 부숴 버리신 것은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블레셋에게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신이심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패배를 하든 망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일이 잘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느니, 하나님은 역시 살아 계시는 위대한 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실패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되고, 모든 원망을 다 끄집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상황과 형편에 처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창조주로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잘되고 못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되고 못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승리와 잘됨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고 이름하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시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세상의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셨다는 그 일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모습 내 형편을 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희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 앞에서 우리 일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한다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희생을 자신이 잘되는 것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하고 하나님이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보면서 비관하고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세상일에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 분이고, 그러므로 나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일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 사람들을 독종으로 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치는 것으로 여기고 언약궤를 가드로 옮깁니다. 그러자 다시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으나 역시 가드 사람들에게 독종이 내려집니다. 다시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에그론의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부르짖음으로 결국 언약궤를 본처로 돌려보낼 것을 계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께 택함 받고 죄가 용서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심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에 있는 제물이 흘린 피의 의미를 깨닫고 진심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긴 언약궤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보기보다는 자신의 승리를 위한 힘을 구하는 것으로 이용한다면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블레셋이며 애굽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세상에서 승리한 자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일 뿐입니다. 혹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다곤 신상이 엎드려져 부서진 것처럼 부서져야 할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블레셋은 결코 다르지가 않습니다. 신에 대한 생각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모두가 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블레셋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블레셋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우리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아니할 자로 살아갑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택하신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진 복입니다.

세상에서의 우리 형편을 보지 마시고, 다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바라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세상이 보는 초라함에 하늘의 부유함이 있는 자로 살아갈 때 항상 감사만이 있을 것입니다.